인터뷰 제16회 들소리문학상 대상 수상자 이 승 하 시인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괴로워하던 나에게 “용서할 힘을 키우라”며 자기 십자가를
감내하고 문학적으로 승화시킬 것 가르치신 구상 시인의 가르침이 큰 힘 돼

 

   
▲ 이승하 시인은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폭력과 광기의 나날>, <박수를 찾아서>,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이 있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이다.

남대문의 한 커피전문점, 이승하 시인(56)은 시상의 원천을 묻는 질문에 시선을 밖으로 향했다. 허공을 헤매던 그의 눈길이 따뜻한 봄볕에 예쁘게 얼굴을 내민 작은 꽃에 닿자 눈에 금세 물기가 어린다. “여동생이 30년째 정신병원에 갇혀 있어요….” 깊은 고뇌 속에서 피워낸 그의 시들은 인류 역사 속에 반복돼 온 ‘폭력과 광기’의 해법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했다.

붓다의 일생을 따라간 시집 <불의 설법>, 그 이야기에서 왜 예수의 고난의 십자가가 떠오를까….
<편집자주>

제16회 들소리문학상 대상에 당선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시인으로서 걸어온 여정에 대해 말씀주시지요.
- 당선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85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 시절에 영세 받은 천주교인입니다. 구상 선생님이 스승이자 대부이시고요. 그분이 저를 천주교로 이끄셨습니다. 당시 숭실대학교 국문과에 다니던 누이동생이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동생을 면회하러 갔지만 증상이 심해 가족의 면회도 거부당했어요. 너무 괴롭고 미칠 것 같아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동생이 그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생을 그렇게 만든 아버지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거든요.

제 시의 큰 주제는 인간의 고통, 삶의 질곡에 대한 것입니다. 등단작인 ‘화가 뭉크와 함께’라는 시는 베트남 패망 이후 월남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배가 전복되어 떼죽음 당한 것을 보고 쓴 시였습니다. 등단작부터 인간의 생로병사와 고통, 질곡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는 암시로 받아들였습니다.

 •  <불의 설법>을 읽으면서 거리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시로 쓰신 것인데, 심사위원들은 구도의 자세는 종교의 구분을 넘어선다고 본 듯 합니다. 대상에 선정된 〈불의 설법〉에 대해 소개해 주시지요.
- 기독교나 불교나 죽어가는 인간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목적은 같기 때문에 가깝게 느꼈다는 것이 맞을 겁니다.
<불의 설법>은 네팔과 인도를 여행하며 붓다의 일생을 따라간 걸음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 득도한 곳, 처음으로 절을 세운 곳, 입적한 곳 등입니다.

다니면서 느낀 것은 인도는 무척 가난한 나라더군요. 지금도 이렇게 가난한데, 몇 천 년 전에는 더 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붓다는 중생 구도를 위해 불법을 설파했던 것입니다.
<불의 설법>은 부처님의 발자취가 있는 곳을 도보로 들여다보고 떠오르는 시상을 시로 쓴 것입니다. 인도는 카스트제도가 있어 가난의 대물림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고, 그래서 여전히 종교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폭탄 테러 등 살상이 계속되고 있는데, 과연 예수님이 이런 세상을 지향하려고 하셨을까요? 2천 년이 지난 지금 인간들이 그분의 뜻을 제대로 받아들지 못하고 있는 거죠. 그런 현실들이 안타까워 이런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   진리에 대해 깊이 천착한 속에서 나온 시들인 듯한데요. 시상의 원천은 무엇인지요?
- 아버지의 폭력과 동생의 안타까운 상황이 저에게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두 달만 다니고 가출해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났지만 동생은 그것을 고스란히 당해내면서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자살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저에게 스승이신 구상 선생님은 “용서할 힘을 키우라”고 하시며 저를 천주교로 이끄셨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그걸 다 감당해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갈 것을 말씀하셨어요.

아버지는 5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병원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이 세상에 저밖에 없었어요.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그때 처음 아버지께 따져 물었죠. 왜 가족들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폭력을 휘둘렀느냐고요. 가난한 집안에서 고학으로 공부해 경찰이 되었지만 날개도 펴보지 못하고 퇴직하셨던 아버지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광기를 가족에게 푸셨던 것 같아요. “나도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줄 줄도 몰랐다”는 말에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뼈아픈 별을 찾아서> 머리말에 아버지께 바친다고 써 헌정했습니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 20년 넘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   구도적 차원에서 종교적 방법론과 진리 규명 과정이 문학예술적 방법과 유사하다고 보이는데요. 견해가 어떠신지요?
- 수업시간에 구상 선생님께서 ‘시(詩)’의 낱말 풀이를 하시면서 ‘말씀 언(言)’ 변에 ‘절 사(寺)’ 자가 합쳐진 것이 시라고 하셨어요. 언어로서 절을 짓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절이라는 것이 참선하고 도를 닦는 청정한 공간인 것처럼 시도 언어로서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 인간 구원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말재주나 말놀음이 시가 아니라 우주적 연민으로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진정한 위안이 되는 작품을 써야 한다고 하셨어요. 지금도 그 가르침이 잊히지 않습니다.

시인들 사이에서 이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신을 길게 발음하면 시인이 되고 시인을 짧게 발음하면 신이 된다고요. 우주를 창조한 신이 그 창조의 능력을 예술가들에게 위임해 역할 분담하고 있는 거란 얘기입니다. 시인도 예술가들도 창조하는 거니까요. 신의 위임 받아 세계를 새롭게 하는 창조행위에 동참하고 있다고요.
시는 상징과 은유로 사고의 폭을 넓혀주고, 아주 낯선 표현으로 충격과 깨달음을 주기도 하죠. 설교에서 시적 표현을 사용한다면 더 감동적이고 기억에 많이 남지 않을까요? (웃음)

 

우주적 연민으로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진정한 위안이 되는 작품을 쓰는 것이 시인의 할 일

 

 •   본지는 기독교의 본질을 찾아가는 방법으로 기독교문학의 저변 확대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들소리문학상을 제정했고 <들소리문학> 계간지도 발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문학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도움 될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 적절한 대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김현승 선생의 시를 참 좋아합니다. 저도 김현승론을 썼고 김현승 시인에 대한 여러 논문을 모아서 <김현승>이란 제목으로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기독교계에서 존경해마지 않는 시인이지요. 이분의 <견고한 고독>이나 <절대고독>을 보면 4·19 때 200여 명의 학생들이 죽는 것을 보고 “신이 있는가? 있다면 방관자가 아닌가?” 하고 고민하며 쓴 시 중에 좋은 것이 많더라고요.

대학원 시절에 문학평론가인 숙명여대 김주연 교수가 기독교문학에 대해 말하면서 “호교나 포교 목적으로 문학이 이뤄지면 문학성을 잃는다”고 잘라 말했어요. 진정한 종교인은 소외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배운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사랑으로 감싸 안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소통하는, 이런 문학을 꿈꿔나가야 진정한 기독교문학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쓴 시들도 기독교문학의 범주에 들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폭력과 광기가 사라지는 세상을 만들려면 결국 인간 사이에 이해와 사랑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 부분을 글 쓰면서 뼈저리게 느끼며 스스로 폭력적 상황을 헤쳐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   <들소리문학> 계간지를 통해 ‘헤브라이즘의 연원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특집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구속사의 원 줄기를 헤브라이즘으로 보고 그 원류를 찾아가기 위한 시도인데요. 혹시 헤브라이즘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으신지?
- 헤브라이즘에 대해 별도로 살펴보진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서구의 문화·문명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밀고 당기면서 이뤄져왔지요. 헬레니즘은 인간주의, 인간성의 옹호, 휴머니즘으로 대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작품으로 보자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도 인간도 아닌 사람들이 시기질투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모함하는 등 인간군상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헤브라이즘은 구약성경의 창세기부터 시작되어 하나님의 약속, 즉 구속사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단테의 <신곡>이나 괴테의 <파우스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같은 서구의 위대한 고전들은 헤브라이즘 정신세계에 뿌리박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었다고 봅니다.
*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그때 고개를 드니
동쪽 하늘에서 살아 숨쉬는 밝은 새벽별
어제 빛났던 별이 오늘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제 이름을 갖고 빛나는 별보다 더 많은 무명의 별이여

별이 있었던 것이다
폭풍우 몰아치는 칠흑의 밤에도
저 하늘 위에는 길을 찾는 이들을 인도할
별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빛나는 별은 없지만
별이 지향하는 것은 영원이 아닌가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별빛이 아닌가

영속하는 것, 영원히 빛나는 것
그 빛을 찾아서 밤하늘을 보면
싯다르타가 득도했을 때 눈맞추었던 그 별
별 하나가 이웃 별들을 불러 모으고 있을 것이다

- 대상을 수상한 시집 <불의 설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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