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종교개혁 5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교회 일각에서 “개혁”을 말하고 있으나 “16세기식”, 또는 “루터식” 개혁은 16세기적 수준의 시도였고 또 그들 16세기 개혁자들은 그들이 내세운 개혁의 요구를 충족시키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16세기식 기독교 개혁은 역사의 과정이었고 역사의 기록일 뿐 그들이 남긴 개혁과제와 함께 우리는 1세기 곧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사울 일파 유대교 열심 파들 돌 세례를 받으면서 순교할 때 했던 말을 상기해야 한다. 스데반이 말하기를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행 7:49) 하였다.

이 말씀은 이사야 66장 1절의 말씀으로 예수께서 요한복음 2장 19절에 남겨주신 바로 그 말씀의 의미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시장 바닥 꼬락서니 같은 그곳에서 말씀하실 때 “너희가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는데 스데반은 예수의 말씀과 이사야 66장의 말씀을 연결고리로 해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이나 스데반은 예루살렘 성전을 이미 성전으로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성전”이라 하실 때 성전은 예수님 자신의 몸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며 새성전이기도 한 그 몸이 십자가 죽음을 거쳐 부활의 날에 드디어 영원한 성전이 된다 하신 말씀으로 스데반은 해석하고 있음으로 보아야 한다.

스데반은 열두 제자 그룹은 아니지만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실 때 같이 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의 성전론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으리라고 보고 싶다.

다시 정리한다.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건물에 계시지 않는다 하였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 곧 의자 정도가 되고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 곧 발 받침대 정도이니 하늘땅도 하나님 모시기가 비좁다는 표현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16세기식 교회론 수준에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스데반은 돌무더기 속에서 죽어가면서 “성전시대 청산”을 말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모세나 세례자 요한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절벽 아래에 갇혀 있다. 시대 선택을 할 줄 모르고 있다. 양두구육이라는 말이 있듯이 겉으로는 예수의 모습인데 그들 속은 모세나 세례자 요한이다.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 하였다. 바울은 사울이었을 때 유대교 율법사 자격으로 스데반 죽인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율법의 저주가 예수 앞에 얼마나 무서운 악독인가를 그래서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루터의 개혁이 아니라 스데반이 열망했던 개혁을 위한 길을 모색해야 한다. 루터는 쯔빙글리와 성찬론에서 그의 “변체설”과 쯔빙글리의 “상징설”을 조정하지 못하고 “너는 내 형제 아니다” 하면서 결별했던 수준이었다.

21세기 종교개혁은 최소한 16세기식은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개혁”에서 “세계종교개혁”의 포부를 열어야 한다. 지구상의 종교는 오직 기독교 하나뿐이라는 신학과 사상의 견고한 시도를 시작해야 한다.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