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제사론, 신학적 발전이 부족했고 이의 대응이 부족하여 16세기 종교개혁은 절반승, 또는 절반의 부족을 감수해야 했다.

실제에 있어서, 당시 16세기 개혁자들의 상대인 로마 가톨릭은 개혁운동 초기와는 달리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루터 등 개혁 세력을 은근히 두둔한다고 믿게 되자 마침내 루터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느냐 하는 단계로 까지 갔었다.

루터의 요구는 한마디로 교황제의 폐지였다. 교황을 사단의 자식으로까지 혐오했던 루터와 상대하려면 로마교회는 교황제 포기의 대안을 준비해야 했었다.

실제로 로마교회는 교황청 대안으로 교회총회를 구상하고 부분적으로 시도의 단계로까지 갔었다. 설왕설래의 과정일 뿐이라고 부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황권은 루터의 개혁세력 앞에서 유럽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 입에서 로마 가톨릭은 이제 끝장이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반전의 빌미가 등장했다. 1525년 1월 취리히 쯔빙글리 개혁운동의 주요 멤버인 7명의 청년들이 쯔빙글리의 반쪽짜리 개혁에 반발한다면서 이른바 재세례 운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재세례파 운동이 취리히에 머물지 않고 유럽 전체로 확산되자 16세기 개혁자들 모두가 “재세례파 소탕작전”에 무자비한 비인간성까지 보이고 말았다.

또 하나 똑같은 1525년 7월에 10만 명의 농민반란군이 루터의 저주를 받으며 몰살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수십만 명은 죽임을 당하거나 모두 노예로 팔려갔다.

저들 독일의 농민(노예)반란군은 루터의 만인제사론에 고무되어 우리 농노들도 드디어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구나 했다가 떼죽음을 당했다.

이 두 사건을 지켜본 로마 가톨릭은 개혁파에게 일부 교회를 내 준다 해도 비교 우위를 지켜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1530년 일어난 로욜라의 이그나시우스의 “예수회”(군대식 선교회)에 이단 소탕령을 위임하면서 16세기 개혁파들의 요구를 일축했다.

그리고 로마교회는 예수회를 앞세워 세계 선교에 나섰다. “안에서 잃은 것 밖에서 보충하자”는 구호를 앞세우고 예수회 2인자인 프란시스 자비에르를 인도, 중국, 일본 등으로 보내서 유럽 안에서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에게 빼앗긴 세력을 아시아 선교로 보충했다.

이 같은 상황은 16세기 개혁파 인물들에게 불리한 인심으로 작용했고, 또 하나의 불길한 징조는 남, 서, 북 유럽으로 확대되어가는 프로테스탄트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만인제사 등 핵심 교리 중에서 만인제사는 사실상 중도에 멈추고, 성례전 등 쉽게 말해서 장로들의 유전 급 수준의 생활전례 문제로 갈등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16세기 종교개혁 세력 내부의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은 절반승 또는 절반패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반환점이기도 한 2017년 이후를 우리가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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