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이슬람 만남의 길 찾는 장편소설 <오옴하르 음악회> 펴낸 소설가 백시종 장로

   
▲ 백시종 장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한 사람의 변화는 역사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백시종 장로의 지난 10년은 강과 산이 변하는 것보다 더한 전환을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시각의 확장을 바탕 한 신작소설 <오옴하르 음악회>(문예바다)는 “배운 대로가 아닌 몸으로 살며 진리를 추구하는 신앙”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의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진 작품이다. 10년 만에 소설을 완성하며 “참된 자유”를 느낀다는 백시종 장로(72), 그는 ‘구도’의 길에 선 자만이 경험하는 시원함을 맛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편집자 주>

△ <오옴하르 음악회>는 2011년 제11회 들소리문학상 대상을 수상작인 <굿바이 수라바야>의 중편 ‘사하라 크리스마스’를 장편으로 이끌어 가신 것이다. 당시는 이슬람에 대해 전형적인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비판적인이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전혀 다른 시각을 보이고 있다.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있는가?

- 들소리문학상 수상 당시만 해도 이슬람은 이단이라는 좁은 식견에 잡혀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 썼던 작품들이 뭔가 아쉬웠다. 본격적으로 장편으로 만들려니까 자꾸만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대립하는 관계에서 숙제가 느껴졌다. 이건 아닌데 하는 호기심이 나에게 계속 작품을 쓰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들소리문학상을 매개로 50여 년 이슬람을 연구해 오신 조효근 목사님(본지 발행인)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만나야 한다던 그분의 이야기가 떠올라 작품이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목사님을 찾아갔다. 그분이 이야기하는 것들이 내 안에서 파문을 일으켰고 1년 반 동안 다시 공부하며 내용을 보완해 내놓게 됐다.

작품을 계획하고 처음 쓰기 시작한 것까지 하면 10년 정도 걸렸다.

△ 가장 궁금한 건 책 제목이다. ‘오옴하르’는 무슨 뜻인가?

- <오옴하르 음악회>는 주인공 ‘노신애’가 사하라 사막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15년 간 선교하는 이야기이다. 보수적인 이슬람 세계에서 기독교 예배당이 인정되지 않아 그녀는 바이올린 악기 하나 들고 마을과 마을을 옮겨 다니며 복음을 증거한다. 선교 과정에서 ‘고갑숙’은 그의 딸이 바이올린 연주를 좋은 일에 활용하고자 하면서 ‘노신애’와 만나게 되고 바이올린은 주인공들의 정서적 합일과 이야기를 풀어가는 중요한 매개이다. 이 두 여인은 우연히 중동-아랍의 청년들에게 겁탈당해 임신했고 둘 다 낙태가 아닌 출산을 결단한다. 이들 둘이 아이를 낳는 장소가 사막의 작은 오아시스 마을인 ‘오옴하르’이다. 소설은 이들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음악가들을 모아서 음악회를 여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기독교인인 두 여인이 이슬람 남성의 아이를 낳는 것이나 기독교와 이슬람 음악가들의 만남은 운명인 듯, 숙명인 듯 두 종교 간의 만남을 보여준다.

△ 세계관의 전환을 경험하신 듯 보인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텐데.

- 모태신앙으로 기독교 분위기에서 자라면서 “배운 대로 믿는 신앙”에 갇혀 있었다. 나 역시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돌아보니 솔직히 무식의 소치였다. 특히 나를 참 곤혹스럽게 한 것은 매년 열리는 장로 수련회였다. 수련회에는 전국에서 수천 명이 모이는데 항상 프로그램 중에 ‘이슬람 고발’ 순서를 넣고 “큰일 났다”고 겁을 주는 식이었다. 왜 이럴까, 내가 조금 아는 상식으로도 그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내 속에 궁금증이 더욱 발동됐다. 이런 식의 대처는 소용없다는 생각에 소설을 쓰게 됐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책 한 권만 읽어봐도 그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뭔가 의도적인 것 같았다. 기독교가 정신 차려야한다는 생각도 들더라.

△ 기독교와 이슬람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소설을 쓰기까지 공부 없이는 불가능했을 듯 보인다.

- 공부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예전과 달리 두리번거리면 웬만큼은 이슬람 자료를 찾을 수 있다. 철저하게 보수적인 종교관을 갖고 있는 집안 분위기에서 친지들에게는 이슬람에 대해 입도 뻥끗 못한다. 이슬람을 이야기하면 관계가 어려워질 정도인 것을 보면서 내가 그냥 호기심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무엇이 옳은가를 스스로 찾아봐야겠다는 사명감이랄까.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그런 문제로 가족들과 갈등하지 않았다면 적당히 지나쳤을 텐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더 견고하게 자리잡아갔다.

△ 연구서적이 아니라 소설이기에 어려운 이야기지만 풀어내기에 유리했을 것 같다.

- 내 나름대로 해석해서 썼다. 아직도 새롭게 깨달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것이 참 행복하다.

△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본질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게 갈등의 요소가 아닐까? 그 간격을 좁혀가기 위한 고민도 있었을 것 같다.

- 앞으로 그런 부분도 제시하는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이번에 소설을 쓰면서 식견이 짧았구나 싶어서 후회할 때가 많았다. 그동안 모태신앙으로 보고 듣고 한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 이상은 안 가려고 했던, 획일적인 종교적 사고로 살아왔다.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책을 읽는 것도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아 꺼렸다. <오옴하르 음악회>를 통해 스스로 둘러친 벽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것이 나에게는 혁명 같은 일이다. 신앙을 피상적으로 알고 살았던 게 창피하더라.

△ 그 선에서 나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 이슬람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게 되니까 눈이 뜨이더라. 최근에 방글라데시나 사우디아라비아 등 이슬람국가들이 피바다가 됐다는 해외토픽을 봤다. 라마단 기간에 소를 많이 잡은 것이다. 방글라데시는 7명에 한 마리씩 잡았으니 백 몇 십 만 마리를 한 날 한 시에 잡은 거다. 서구 문화권에서는 그들을 미개인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그들은 구약에 동물을 잡아 제사 지내던 것을 그대로 지키며 하나님의 계명을 삶속에서 살고 있다. 기독교에서 그렇게 하나? 그들은 종교가 곧 생활이지만 기독교는 이중생활을 한다. 삶의 모습으로는 비교가 안 된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신앙 따로 삶 따로인 이중적인 모습으로 다가간들 어떻게 감동을 줄 수 있겠나? 그들을 반대할 생각만 하지 말고 기독교 본연의 모습을 삶으로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 작품 중에 영국 선교사 ‘제임스 올드먼’은 ‘노신애’의 도그마에 갇힌 신앙에 자꾸만 의문을 던짐으로써 빗장 여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에서 핵심적 부분을 꼽으신다면?

-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어려웠을 때 하나님께서 변화시키려는데 안 되니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도구 삼아 이스라엘을 치셨다. 이슬람은 혹시 방향을 잃어버린 기독교를 향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 이야기를 올드먼이 제시하는 부분이 있다. 하나의 역설일 수 있지만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이상하게 기독교는 감소하고 이슬람은 나날이 커진다. 원인은 모르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 문단에서 중진의 위치에 계신데 부담은 없었나?

- 오히려 일반 문단에서는 소재도 신선하고 이야기 구성도 탄탄하다며 평가가 좋다. 나 스스로도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 소설을 통해 기독교인들에게 해주고픈 이야기는 무엇인가?

- ‘오옴하르 음악회’를 쓰면서 내가 무식의 소치에서 조금 벗어나는 행복을 만났듯이 기독교 신자들도 그걸 느끼게 해 주고 싶다. 둘러 친 벽을 깨고 스스로 찾아가도록, 한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매듭 하나만 풀어줘도 내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신이 다르다면 당연히 싸워야겠지만 두 종교가 섬기는 하나님은 본디 같은 분이 아니었던가.

△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 한 번 물꼬를 텄으니 써야 할 것들이 참 많다. 그러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내년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들소리신문에서 준비 중인 유라시아 횡단 계획도 기대된다. 실크로드를 타고 1천 년 간 이어진 기독교의 역사 속에 숨겨진 비사를 찾아내고 소설로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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