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변화가 16세기에서 정지된 기독교가 안타까울 뿐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예배당 문에 붙인 95개항 교황권을 향한 마르틴 루터의 항의문을 본다.

한동안 큰 동요가 없던 유럽은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교황이 루터를 불러 파문하고,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루터를 심문하던 첫날에 루터는 벌벌 떨었다. 묻는 말에 한마디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젊은 황제가 연민의 눈을 굴리면서 루터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어느 순간, 루터가 말했다.

“잠시 휴식시간을 주소서.” 당시 기록자는 루터의 이 말이 입 안에서 뱅뱅 돌았었다고 했다. 황제는 흔쾌히 잠시가 아니라, 심문을 그 다음날로 연기했다.

다음날 심문장에 나온 루터는 어제 그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눈이 반짝였다. 용기 백배의 모습이었다. 루터는 드디어 황제를 감동시켰다.

루터의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는 스페인의 개혁자인 라스 카사스 신부가 당부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황제는 용기있는 루터의 자신감에 마음으로 한량없는 격려를 보냈을 것이다.

루터가 선두에 선 독일 종교개혁은 독일에서 끝나지 않았다. 요원의 불길이었다. 중부, 남부, 북부, 서부 유럽 전체로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져갔다. 종교개혁이었다. 기독교 개혁이 아니라 종교개혁이라는 어휘를 유심히 살펴보라. 16세기 루터와 그 친구들이 봉화를 올린 기독교는 세계 문화사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서 그들의 개혁운동은 모든 종교들을 대표하는 말 그대로 “종교개혁” 이라는 대접을 역사로부터 받아 누리고 있다.

지금 같은 기독교 처지로는 “기독교 개혁”이라는 말도 일반 사회인들은 픽 웃어 넘길 수 있다. 그러나 당시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선언은 세계사의 대변화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중세 봉건시대가 끝나고 자유자본국가들이 등장했고,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이동할 준비를 했고, 동서문화, 곧 유럽과 아시아의 해양 실크로드가 본격화 되면서, 유라시아의 문명 교류가 활발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기독교 사람들은 중세 가톨릭을 생각할 때 루터로부터 사단의 자식이라고 욕을 먹던 교황권인 줄 착각하는데, 아니다. 가톨릭은 변하고 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덕을 본 종파는 로마가톨릭이라고 해야 옳다.

로마가톨릭은 당시 프로테스탄트의 요구를 다 들어줄 준비까지 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내 주기에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신흥 기독교가 미덥지 않았다. 그들은 1550년대의 자기 변화, 1648년 신·구교 30년 전쟁 끝내고 또 변화, 1750년의 변화, 1800년대, 1960년의 변화까지 로마가톨릭은 줄기차게 자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일반 사회는 더 말할 것 없이 루터에게 큰절할 만큼 변화해 왔다. 오직 변화가 16세기에서 정지된 기독교(프로테스탄트)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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