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499주년 오직 성경, 오직 믿음, 만인제사장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 개혁되어야 한다는 이름(Reformed)으로 태동한 신교(기독교)는 종교개혁 499년의 오늘,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사진은 회개집회에서의 목회자들 모습.

사제의 허락 하에만 볼 수 있었던 성경이 대중화돼 열려 있지만 그 잣대로 살지 못해

오직 믿음이라는 약속의 계시어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세속어로 처리해버리는 현실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임을 실현해내기 위해서는 완성도 있는 신앙 과제 절실

10월 31일은 가톨릭의 개혁을 부르짖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499주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30~40년 전만 해도 한국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기리기 위해 교회와 단체에서 다양한 모색을 했지만 요즘은 개 교회에서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만인제사’의 부르짖음은 그 당시에는 획기적이고 파급효과가 컸지만 시간이 지나오면서 요즘 한국교회는 오히려 루터의 이 부르짖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그 해법은 무엇일까. 루터가 주창했던 개혁의 내용을 중심으로,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개혁 부분을 되짚어 본다.

◐ 오직 성경-누구나 볼 수 있게 됐지만…

루터는 진리를 판가름하는 잣대, 최종 권위가 ‘오직 성경’에 있다는 것을 주창했다. 성경만이 그리스도 교리의 유일한 원천이며 성경 밖에서 해석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된다.

루터의 이 강조 논법은 오늘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오늘날 신구교를 막론하고 아니, 일반사람들도 보기를 원하면 성경을 누구나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당시에는 라틴어 성경만이 중심이었고, 이것도 사제의 허락에 의해서만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시대에 영국에서는 성경번역자 위클리프가 1382년에 신약성경을 출간했다. 그는 교황청의 특권주의를 공격했고, 수도원주의 성자숭배 등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자 교황청은 그를 이단으로 판결하고 그의 모든 저작물을 불태우고, 그가 죽은 지 21년이 지나 그의 무덤을 파헤칠 것을 결정할 정도의 사건이었다.

기독교 역사 2천년 중에 성경은 1500년 동안 가톨릭에서 허락된 사제들에게만 공개됐었다. 신교의 종교개혁 중심에는 접촉이 금지되었던 성경을 쉽게 번역하여 일반인에게 널리 보급한다는 충격적인 선언들이 큰 명분이 되었다.

1545~1563년 이탈리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도 성경은 일반인에게 공개해서는 안 되는 성스러운 경전이라고, 평신도 열람과 보유를 금지하는 걸 재확인할 정도였다.

그러나 13세기에 유럽에서는 대학교육에 눈을 뜨면서 지식인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학습하면서 고전어 해독능력을 갖추었다. 헬라어를 공부하고,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문학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많은 평신도들이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으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쳐 주는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맹목적 복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6세기 초 거의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은 학교에서 르네상스 휴머니즘으로 학습을 받았다. 종교개혁자들은 공용어이던 라틴어에 능숙했고,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에라스무스가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을 편집하여 출판했다. 누구나 그런 고전들을 해석하여 참된 의미를 찾으려는 훈련을 받았었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학습방법과 문화적인 환경을 조성해 놓았다.
루터 또한 신구약 모두는 아니지만 1522~1523년 성경을 번역하기에 이르렀고, 1534년에 여러 종교개혁자들과 동료 교수들의 힘을 합쳐 완역한 독일어 신구약 전서가 나와 일반 사람들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가톨릭은 1666년 6월 ‘금서’로 분류해 놓았던 책 목록들을 폐지했다. 거기에 성경도 포함되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성경이 가깝게 열려지게 된 것은 불과 500여 년도 안된 셈이다.

가톨릭이 모든 신자들에게 성경을 공개하지 않고 몇몇 사제들에게만 허용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민족 이동기 기초가 제대로 되지 않은 야만인들에게 무작정 공개했을 때의 위험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 신교는 어떤가. 모든 성경이 열려져 있고, 특정인의 해설을 곁들인 주석들이 난무하고 있고, 목회자나 성도 중에서는 자기 나름의 해석을 붙이고 있다. 이로 인해 성경의 권위가 상실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것이다.

열려져 있는 성경이라고, 누구나 다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재단할 수 있는 풍조는 오히려 ‘오직 성경’이라는 개혁자들의 외침을 퇴색하게 하는 부분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 오직 믿음-약속이 동반된 계시어

루터의 이신득의는 매우 간절한 소원 가운데 그에게 내려진 은총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려지지 않는 ‘은총’을 다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지만 인간의 나약함과 무지로 인해 인간의 노력과 행함의 강도를 높이면 될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NO”를 주창한 것이다. 그가 받은 은혜의 목소리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한국교회 속에서 왜곡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반성을 자아내고 있다.

한국처럼 미신 같은 신앙이 바닥에 깔려있는 상황 속에서 ‘오직 믿음’이라는 것이 제대로 체화되지 못했다는 지적들이 높다. 그런 나라 속에서는 루터가 말한 이신득의의 내용이 실패할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계시어와 세속어를 구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입’으로만 시인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세속어가 아닌, 하나님이 온전히 ‘임하시는’, 즉 약속이 동반된 계시어로서의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글의 ‘믿음’이라는 단어의 의미 속에 담겨진 뜻을 추적해야 하는데,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어에 접근하여 근원 속의 참뜻을 이해하고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하나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좇아 살아내는 힘이 ‘믿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곧 행위를 동반하고, 그 행위 속에는 믿음의 은총이 기반하는 것이다.

요즘 학자나 목회자들 사이에서 100년 전부터 한국교회의 청년들의 토론회 주제였던 ‘믿음이냐’, ‘행위냐’가 뒤늦게 또 나타나서 갑론을박이 종종 벌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신성과 인성처럼 어느 순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의 시각 차이일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마 7:15~21)라는 말씀을 근거로 보면 그 행위가 믿음인줄 아는 단계를 말씀하신다는 것임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루터가 주창한 ‘오직 믿음’의 본질에 접근하여 그 은총을 갈구해야 하는 제2 종교개혁의 과제를 안고 있다.

◐ 만인제사장-완성도 있는 신앙의 경지

루터가 주창한 것 중에 ‘만인제사장’ 정신이 있는지 아는 이들은 극히 드문 것 같다. 모든 성도가 곧 사제이자 목회자라는 의미인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신자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정신이다.

사제에게 죄를 고하는 고백성사를 하지 않고, 예수님께 신자가 직접 할 수 있는 것이다. 루터 시대에는 교황의 권위가 워낙 막강해서, 죄를 사해주는(면죄부)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사하는 행태가 자행되었다.

성도의 평등함을 강조하는 ‘만인제사장’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직자인 목사는 죄를 사하는 구약성경의 제사장적인 절대적 계급이 아니라 성직 그 자체로 예배를 인도하며 성례전을 책임지는 자의 의미이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역할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완성도 있는 신앙의 단계에서 가능하다고 볼 때 오늘 한국교회에 여전히 남아있는 숙제이다.

성도가 나치게 목회자의 ‘말씀’(설교)에 의지한다거나, 자신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 교감하기보다는 목회자의 기도에 의지하는 태도는 ‘만인제사장’의 길에 다다르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또한 성도가 목회자를 마치 신적인 존재로 간주하여 ‘완벽’을 요구하거나 오히려 목회자 자신이 신의 권위를 가지고 모든 것을 행사해도 되는 것처럼 신자를 위협하는 태도 역시 장애 요소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는 말씀처럼 신자는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예수’에게서도 자유케 되는 경지에 다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완성도 있는 신앙을 추구하고 그 지경에 가깝게 되면 목회자는 목회자답게, 성도는 성도답게 그 위치에서 교회가 예수의 몸통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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