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기독교(景敎)_ 下 60

유승 유승 유승이라…. 다위드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어렸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알로펜 총주교로부터 꾸중을 듣는 시간에도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곤 했었다. 부친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왜 꾸중을 들으면서도 싱글거리느냐고 물으면 자신은 알로펜 어른이 파미르 고원 골짜기 불승의 신분인 자기를 제자 삼아 주신 것이 평생의 감사조건이오 했다고 한다. 어둠의 자식 노릇을 하다가 흙이 되어버릴 인간인 유승 자신은 늘 축복의 인생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어른을 왜 내가 만나지 못했을까.

다위드는 쿠처 시내로 길을 잡았다. 길을 가다가 주막을 만나면 목을 축이고 시장하면 탁발을 했다.

“사명은 여기 쿠처에 머무셔도 됩니다.”

하루 더 노숙 한 후에 다위드는 사명에게 쿠처에 남아도 된다고 말했다. 사명 승은 두 손을 모아 쥐고 말했다.

“스승께서는 기독교 제자에 만족하시나 봅니다. 저는 석가모니 부처와 다위드 스승님을 저의 좌우 어른으로 모실 작정을 하고 있는데요.”

“그렇군요. 그러나 늘 선택은 자기 몫입니다. 그리고 스승 여럿을 두면 자칫 게을러지거든요. 아무려나 마음대로 하시구려. 나야 뭐 늙은이 형편인데 여러분 신세나 지는 몸인걸….”

“우리 스승님은 제자 버리는 일에 이력이 나신 분입니다. 사명께서는 견디기 힘드실 겁니다.”

“예끼 이 사람, 내가 언제 제자들을 버렸다고 그러느냐. 하기야 진즉 버리고 싶은 놈이 하나 있기는 하다만 말이다.”

말을 해놓고서 다위드는 큰 소리로 웃는다. 말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사명이 따라 웃는다. 두 사람 사이에서 걸레 씹은 표정을 잠시 보여주던 샤프르가 더 큰 목소리로 크게 웃는다. 그는 웃음소리로라도 압도하고 싶은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그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빨리 몸을 돌렸으나 다위드에게 들키고 말았다.

“흥, 순진하기는…. 사내가 그렇게 나약해서야 되는가. 태산 같은 중심을 잡게나. 나 지금 사미르칸트로 가려는 거야. 그곳에 가면 인간사라는 것까지,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모두가 흐름일 뿐임을 알게 되지. 한 번은 황하 저편 장강을 따라서 배를 띄워본 때가 있었지요. 그 강은 강이 아니라 바다였어요. 저 대양으로 바로 이어졌으니 바다는 바다였지. 우리 모두는 바다까지를 마음에 두고 진리 수행을 서둘러야 해요. 진리는 기독교요 수행은 불교라는 생각이 들던데 사명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스승님, 저의 스승님이신데 어찌하여 말씀을 힘들게 하시나요. 경칭은 약하시고 샤프르 대하듯이 저를 지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누가 누굴 지도합니까? 선생님은 한 분 하나님 뿐이시지 우리는 모두 진리수행의 도반들이예요. 글쎄 더는 그만두고 진리와 수행의 관계를 어찌 생각하시는지 말해 보세요.”

사명은 긴장했다. 진리는 무엇이고 수행은 무엇인가? 이 간단한 것을 왜 물으시는 것일까?

“진리는 우리가 가는 목표가 되고 수행은 지금 우리가 계속 해가고 있는 반복된 발걸음이옵니다.”

“그래요. 진리는 진리인신 거야. 그 이름에 인격을 부여하니 하나님이라 하고 그대들은 부처라 하지. 그러나 부처라 해도 그분이 수행(修行)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면 부처일 뿐 그 이상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얻었다 함도 아니요 붙잡았다 함 또한 아니라 주께 잡힌 바 된 그것을 붙잡으려고 나는 달려간다고 우리의 대 선배 되신 바울께서 말씀하신 건가요.”

샤프르가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다위드가 손뼉을 치면서 기뻐했다. 사명 또한 샤프르의 어깨를 토닥여 주면서 참 멋있는 말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샤프르 많이 배웠구나. 이미 주께서는 너를 가르치셨어 더 배울 것이 없는 거야.”

“그럼 샤프르는 수행에만 전념하면 더 큰 인물이 되겠군요.”

“말해 뭘 하나. 사명 또한 진리 앞에 붙잡힌 수행자이시고 나 다위드 또한 수행을 게을리하여 인생을 망치지는 않을 거야.”

다위드가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미르칸트 그곳에 가면 여러 색색의 사람들이 많아요. 또 그들은 도대체 몇 나라 출신들일까. 그들의 말을 못 알아듣겠어요. 그러나 로마나 중원 사람들의 말과 페르시아와 아람 사람들의 말이 뒤섞이는 것 같더구먼. 그런데 말이죠. 그들은 서로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 몇 마디 씩을 가지고도 충분한 서로 간의 거래를 잘하고, 사귐에도 불편하지 않는 것 같아서 신기하더군.”

“인간이 터득해 낸 지혜가 아닐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스승님, 아까 말씀하신 진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샤프르가 물었다.

“글쎄 그건 우리 기독교 안에서의 표현으로는 대속(代贖)이야. 대신 죽어주심인데 사람들의 관여가 필요 없이 진리이신 분이 일방적으로 제시하신 일종의 은총이지. 밤안개요 아침 이슬과 같은 본원적인 것이고 인간이 숨쉬는 숨과 같은 것이지요.”

“주시는 분이 딱 한 분이시겠어요. 자연과 사람의 목숨이니까요.”

“그렇지.”

다위드와 샤프르의 대화를 지켜보는 사명의 눈길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사명은 말씀이 없으시네. 내가 괜한 말을 했나요?”

샤프르가 사명의 오른손을 살포시 잡아 주면서 위로하듯이 말했다.

“아니오. 우리 불교는 그 말씀을 매우 쉽게 배우는데 정작 기독교 교리를 기독교인들이 어렵게 말하고 또 어렵게 흉내 내면서 가끔 싸움을 하더군요.”

사명이 기독교의 허점을 찔렀다. 사명이 한 말을 다위드는 곧장 알아들었다. 그가 평소 제자를 가르칠 때 좌우명으로 다짐해 온 그 말을 사명이 하고 있었다.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인 대속(代贖)을 가르치려 들거나 자기 경험을 동원하여 설명하려 드는 행위는 옳지 않다. 진리를 어찌 설명한다는 것인가? 진리는 몸으로 사는 것이지 설명하거나 가르치는 법이 아니다.

불교에서 수행(修行)이라 하는데 이는 매우 적절한 행실의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오신 행위를 어떻게 설명한다는 것인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난데없이 외마디 비명처럼 뱉어낸 이사야 선지자이지만 그는 이 말씀에 대하여 추가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이사야 7장의 이 말씀은 7백여 년 후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그 해석이 이루어진다. 가르침으로나 설명으로 진리를 표현해 낼 수 없다. 그저 그가 그이실 뿐이다. 다위드는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사명이 한 말에 대하여 동의해 주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명의 말을 듣고 보니 이 사람도 반성을 많이 해야겠어요. 아니야 내가 지위에서 내려와서 한 사람의 진리 찾는 자 또는 수행자의 신분을 지켜내려는 열심이 답이겠지요.”

“말씀의 깊으신 뜻을 조금은 알 듯 하옵니다. 어르신에 대한 저의 존경심을 막지 마소서.”

사명은 걷던 길을 급하게 멈춰 서더니 이어서 그 선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다.

“아니 이거 왜 이러시오.”

“네. 송구합니다. 제 마음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이러는 겁니다. 스승님, 저의 성급함을 용서해 주세요.”

“저도요. 스승님.”

사명이 엎드리자 샤프르도 덩달아 주저앉아서 머리를 조아린다.

“이러지들 마시오. 갈 길이 멀어요. 길 가다가 이 무슨….”

다위드는 두 젊은이를 채근하여 일어나게 했다.

“어서 갑시다. 나는 바쁘오. 나 지금 사미르칸트로 갑니다.”

“앞서 말씀 하셨어요.”

샤프르였다.

“아, 그런가. 앞서 한 말은 나 자신의 방향을 말했고 지금은 자네의 동의를 묻는 것이겠지.”

“네, 그러신 줄 알고 있나이다.”

샤프르는 자신 있게 말했다.

사미르칸트는 번잡했다. 여러 색의 얼굴인 유럽 사람, 아라비아 사람, 투르크 사람, 몽골 사람, 얼굴 또한 시컴한 사람들, 하얀 사람들, 황색의 사람들이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 다닌다. 사상과 종교를 설파하기 위해서 다닌다.

당나라에서 철수한 다위드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근본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중국인,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학문과 사상은 물론 그들의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외래인들에게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고 합격자들에게 주요 관직을 내어 맡기는 민족, 특히 국방을 책임지는 군 사령관의 자리도 선뜻 내주는 그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특히 BC 1천년 전에 만든 문자. 그리고 춘추전국시대 과정을 통해 지혜와 사상을 다듬는 솜씨, 끝없이 배움 또 배움의 여유를 가진 민족성은 혹시 저들이 제2의 이스라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미르칸트가 소그디아나 민족의 도시라 하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힘은 중국인들에게서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사미르칸트의 거주인이거나 중국인들은 물론 투르크인들도 이 도시의 주인이라면서 텃세를 하지 않으니 좋았다.

다위드는 사미르칸트와 이식쿨 사이 산비탈에 거처를 마련했다. 책을 읽는 집과 기도하는 집을 각각 따로 마련하되 주변에서 불편을 줄 때는 떠날 채비를 미리 해 두는 치밀한 칩거에 돌입했다.

찾아가고 싶은 사람,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시련과 핍박을 온몸으로 받았다는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이 지금은 로마 기독교와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당나라에서 저지르고 있으니 그 배신감으로 지금 이 시간은 허무하고 허탈했다.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