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조년 한남대 명예교수

제목을 이렇게 달면 이 신문에서 실어줄까? 실린다고 읽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제목을 달고 글을 쓰는 나는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할까? 나도 그 속에 있다면 누워서 침 뱉기 아닐까? 그렇다고 가득 찬 침을 아니 뱉을 수도 없고, 남에게 뱉는다고 한 것이 강한 바람에 날려 제 얼굴로 날아들게 하는 것보다는, 제 얼굴에 뱉어버리면 차라리 낫지 않을까? 그러니 누워서 침 뱉기는 차라리 아름다운 것이 될 것 같다. 적어도 남에게 해를 주지 않고 자기성찰의 귀중한 한 작업이지 않을까?

내년이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지 500년이 되는 해라고 기독교 신교 일부에서는 야단이다. 야단이라고 하지만 무슨 큰 개혁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루터가 95개조라는 것을 내 건 비텐베르크교회를 방문하는 여행계획을 세우느라고 야단이란 말이다. 거기 가면 루터를 만날 수나 있을까? 설령 그가 거기 그렇게 있다 한들 그게 지금 내가 좋은 크리스천으로 사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일까? 거기 가면 루터에게 내렸던 벼락이라도 내려서 벌렁 나자빠진다든지, 아니면 깜짝 놀라서 어떤 깨달음의 한 알이라도 얻어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심지어 지금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가보자고 한다고 한들, 그것이 또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고 물을 판인데 루터가 개혁한 지 500년이라는 것이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야단들이냐 말이다.

그를 기념하지도 말고, 그날을 생각하지도 말고, 그가 내세운 95개조도 더 이상 되뇌지 말라. 그것들은 이미 다 썩어서 없어진, 아주 낡고 케케묵은, 그래서 냄새도 나지 않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지 않던가? 그렇게 아무 것도 없이 된 것은 그것을 바라지도, 듣지도, 기념하지도 말란 뜻 아니던가? 그런데 왜 그리 야단일까? 차라리 그 돈을 잘 모아 북한의 수해 만난 동포들에게 보내는 데 보태든지, 아직도 저 달동네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올겨울 춥지 않게 보낼 수 있게 따뜻한 옷이라도 사서 주는 데 보탤 일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개혁을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회생의 가능성이 있을 때, 조금 수술을 하거나 시술을 하거나 약을 주어 좀 낫게 할 가능성이 보일 때 하는 것이지, 아예 오늘의 기독교 흐름으로 보면 개혁의 대상도 되지 않는단 말이다. 그래서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질책하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다. 왜 교회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러니 이렇게 하면 어떨까? 주일마다 공동으로 외우는 사도신경, 공동고백이라는 것은 더 이상 하지 말자. 그것이 그렇게 믿는 사람에게는 고백이요 믿음이지만, 그것에 들어 있는 깊은 뜻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형식으로 외우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참으로 나가는 길에 걸림돌밖에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2000년 전에 죽은 예수가 어떻게 나의 구원이 되는가 심각히 따져보자. 그는 그렇게 구원자로 세상을 떠났다면 나도 내 구원자로 스스로 십자가에 나를 못 박아 죽어야 한다고 선언하자. 그가 죽어서 산다면 나도 죽어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가 개혁했다고 말하지 말고 나를 혁명하는 데 내 온 힘을 쏟을 일이다. 그때 그 개혁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그가 어떻게 스스로 자신을 혁명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자신을 혁명하지 않고는 결코 자기가 속한 단체나 민족이나 문화를 개혁할 수는 없다. 지금, 민족 안에 있고, 나라 안에 있고, 역사 안에 있고, 문화상황 안에 있는 나, 한국의 기독교라는 변질된 상황 속에 있는 나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 안에서 내가 어떻게 나를 혁명해야 하는가를 살필 일이다.

모든 종교인은 며칠이라도 무종교인이거나 다른 종교인으로 돌아가 보자. 성직자는 평신도로, 평신도는 성직자로 바꿔 보자. 그렇게 하면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그 자리가 거짓의 자리요, 변하는 자리라는 것을 금방 알 것이다. 거기 헛다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 금방 드러날 것이다. 그때 혹시 들리는 소리가 있지 않을까? ‘거기 네가 서 있는 자리는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거룩하게 될 땅이니 신발을 벗으란다. 그 소리를 제대로 들을 때 내 자신이 혁명이 되고, 내가 속한 단체가 개혁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루터도 죽었고, 예수도 죽었다. 더 이상 죽은 자를 죽은 자 속에서 찾지 않고, 살아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그를 만나는 데 온 뫔을 쏟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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