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천년여행 [ 199 ] / 당나라 기독교(景敎)_ 下 63

“주교님! 다시 한 번 보세요. 목숨 하나뿐입니다.
금번의 사태는 우리 경교가 아니라 불교를 손본다는
뜻을 담고 있어요. 왜, 우리가 뛰어들어서 죽어야 합니까?
이건 아닙니다.”

 

이영부 노사제의 인솔에 따라 서북쪽으로 길을 떠난 장안의 신자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엘 비수 주교의 전송을 받을 때만 해도 의기양양했으나 수도 장안이 멀어지자 하나같이 시무룩해졌다. 1천여 명 이상은 될 법한 무리들인데도 발자국 소리도 크지 않았다.

“우리들은 지금 귀양 가는 것이 아니야. 장안에서 순교를 자처하는 아이엘 비수 주교의 뒤를 이어 산 순교자들이 되고 싶어서 변방으로 훈련을 떠나요. 기죽지 말고 모두들 힘내야 해요.”
이영부 노인의 힘찬 목소리에 그의 주변을 지키는 청년들이 박수를 치면서 함성을 질렀다.
“할렐루야. 주 예수 만세. 이영부 사제님 만세!”

그러나 군중은 크게 활기를 띄지 못했다. 웅성거리는 몸짓들이 약간 더 힘차 보일 뿐, 그들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발길은 계속되었다. 잠시 더 가자 인근 군부대에서 마련해 준 야영지가 나타났다. 야산 널찍한 분지에 군용 천막들이 여기저기에 준비되어 있었다. 아이엘 비수 주교가 통지해서 네스토리우스 파 사령관 휘하의 부대 병사들이 군막을 피난주민 야영용으로 준비해둔 곳이었다. 부대장이 이영부 사제 앞으로 달려왔다.

“아이엘 비수 주교님은 오지 않으셨나요?”
군례를 올린 장교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네, 뒤에 오신다 했습니다.”

이영부 사제가 말했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장교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가 아이엘 비수 이야기를 그에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했는지 그는 장교를 이끌고 군막들을 한바퀴 돌았다.
“많은 수고를 하셨네요.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으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도망치는 자들이 이토록 호강스럽게 군막에서 쉴 수 있으니 송구합니다.”
“사제님,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국경지대에 가시면 간이 주거 환경을 만들 수 있고, 그곳에 난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 네스토리안들이 가서 그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가보시면 알겠지만 그들에게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이영부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도 난민들의 처지를 안다. 가서 그들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다니 감격해서 눈물이 났다.
그 시간 아이엘 비수 진영에서는 출정식 같은 기도회가 열렸다. 그들은 주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했다. 죽으러 가는 것이다.
“여러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셨지요?”
“아멘입니다.”
30여 명의 젊은이들이 합창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의 몸으로 굴속에서 벌벌 떠는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종종 이 말씀을 잊어버리고 비굴한 인생을 살아가기도 하는데 그건 사단에게 속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처럼 살다가 예수처럼 죽어야 할 때가 오면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아이엘 비수 주교님과 함께 죽음의 현장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참된 축복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아이엘 비수가 양웅렬 수사를 위해서 죽었나요. 아닙니다. 예수, 예수십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 무종황제의 칼에 죽을 수 있어야 해요. 아이엘 비수는 여러분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예수께만 주셨어요. 여러분 중에 아이엘 비수의 뜻에 따르는 죽음을 혹시라도 생각한다면 그건 개죽음입니다. 아셨습니까?”

“네, 잘 알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의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예수와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해 주실 줄 믿나이다.”
양웅렬 수사였다. 그가 울부짖었다. 그의 말을 끝으로 그들은 황궁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들 사제급 헌신자들을 바라보는 수백 명의 무리들이 어둠 속에서 황궁 방향으로 가는 믿음의 용사들을 향해 울먹이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입안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감추기 위해서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어떻게 해. 우리는 배신자야. 이영부 사제를 따라 국경을 넘지도 않고 아이엘 비수의 십자가 행도 함께할 수 없는 버림받은 자들이야. 아이고, 아이고….”
아이엘 비수 등이 가는 길을 더는 바라보지 못한 자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금군청에 미처 이르지 못한 곳에서 검은 복면들이 아이엘 비수 일행을 가로막았다.
“멈춰! 뭐하는 놈들이야!”
그들은 모두 칼을 뽑았다. 칼날이 희뿌연 불빛에 번쩍였다. 충분히 불안감을 느낄 만큼 스산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황제 앞에 호소할 내용이 있어서 찾아온 네스토리안 기독교 사제들입니다. 우리를 안내해 주십시오.”
“그래, 안다. 우리가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너희 소원을 들어줄 거다.”
이 말과 동시에 앞줄에 있는 사람들부터 오라를 지었다.
“묶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자원하여 황제 앞에 충언을 드리고자 하는 충신들이다. 충신들을 범죄자 취급하지 마라.”
“충신 좋아하시네. 너희들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다. 너희 앞에는 너희가 원하는 죽음밖에 줄 것이 없다.”
“…….”

모두가 묶였다. 그들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당나라 황제에게 맡기기로 한 이상 군사들과 시비할 일이 없었다.
다음날, 금군청 장수가 아이엘 비수를 별도로 불렀다. 아이엘 주교에게 얼굴은 익지 않았으나 예의를 갖추어 대한다는 인상을 풍겼다.
“주교님이시죠. 아마 요즘 황제의 심기를 아실 터인데 왜들 고집을 부리시는지, 중간에서 저희가 다 민망합니다.”

아이엘 주교가 말없이 웃었다. 그는 혼자생각을 잠시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높으신 분 같으니 하는 말입니다마는 저희는 어명을 거스르거나 제국의 방침을 거부하자는 뜻은 조금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 종교가 하느라고 열심히 황제 폐하와 당 제국을 위해서 충성을 다했는데, 그래도 충성이 더 필요하다면 몸 바쳐 드리고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황상 폐하를 알현할 수 있다면 저희가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를 하명 받고 싶습니다.”
아이엘 비수는 정성을 다해, 그리고 조심스럽게 금군청 장수에게 소신 있는 의사를 전달했다. 장수는 헛허, 하고 헛웃음을 흘리면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입을 연다.

“아이엘 주교님, 서둘러 죽으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아이엘 비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알겠습니다.”
“뭘 안다는 겁니까?”
금군청 간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네, 목숨을 내놓으라는 뜻이 아니실는지요?”

“그렇소. 황상께서 자중자애를 요구하면 조용히 지내다가 때를 얻어야지, 떼로 몰려와서 시비를 하려 들면 불충이 아니겠소? 그때는 더 무엇을 바라겠다는 것인지. 내가 생각할 때는 죽기로 작정했던지 아니면 달콤한 말을 앞세워서 황상의 뜻을 꺾어보겠다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더는 긴 말이 필요 없소. 각기 여러분의 처소로 가서 자중자애하면서 다음 칙령을 기다리든지 아니면 알아서 하시오.”
금군청 장수는 부하를 불렀다. 금군 사령이 달려왔다.
“이 사람들 소원대로 해 주도록….”

아이엘 비수 주교가 멱살을 잡히다시피 해서 끌려 나갔다. 인정사정이 없었다. 금군청 뒷마당에 모두 무릎 꿀려 앉혔다.
“너희들에게 잠시 판단할 시간을 준다. 목숨을 내놓겠는지 아니면 조용히 돌아가서 근신하려는지 너희들 스스로 판단하라!”
진흙바닥이나 진배없는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사제들은 그들의 향후를 직감했다. 어느 누군가가 외쳤다.
“우리는 죽기를 원한다. 죽음으로 우리의 진리를 말하게 해 주시오.”
“그래, 우리의 진리라…. 세상에 진리가 여러 개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너희 진리 하나쯤은 짓밟아도 괜찮을 것 같구나.”
“그건 말장난이요. 둘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하나다. 황제에게 목숨 바치는 것이 진리다. 우리는 황상 폐하의 뜻을 따라서 죽기로 했다.”
아이엘 비수 주교의 말이었다.

“뭐라고? 황상의 뜻을 따라서 죽는다고? 이게 무슨 소리야?”
군관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중국 사람들은 선비가 많다더니 하급군관이 아이엘 비수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가 한 말을 건성으로 넘기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던가보다.
금군청 성봉수 부장이 나타났다. 그는 아이엘 비수 주교 앞에 가더니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교님, 이게 뭡니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이 젊은 인재들을 보세요.”
“보고 있소이다.”
“주교님! 다시 한 번 보세요. 목숨 하나뿐입니다. 황제께서 주교님과 사제들께서 이러시는 것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금번의 사태는 우리 경교가 아니라 불교를 손본다는 뜻을 담고 있어요. 왜, 우리가 뛰어들어서 죽어야 합니까? 이건 아닙니다.”
성봉수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조효근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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