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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놓쳐버린 신앙공동체를 찾아서한국교회, 21세기 이렇게 대비한다 [39-35]
無然  |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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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호] 승인 2016.12.07  14: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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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개혁운동이 유럽 사회에 정착해가는 1525년도에 돌발사태
두 개가 터져 나왔다. 재세례파 운동과 농민반란이었다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16세기 종교개혁자들 어느 누구도 이것이 종교개혁의 완성편이라는 욕심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구약을 건너오는 신약의 과정마저 큰 의미에서 ‘개혁’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이 부분은 메시아이신 예수께 얼마간 송구한 표현이 되겠으나, 그분이 ‘내가 다시 오겠다’ 하심으로 큰 의미에서는 모든 인류사는 개혁의 역사로 정리해도 될 것이다.

16세기 개혁의 선두주자인 마르틴 루터의 활동을 평가할 때 그의 많은 공로에도 불구하고 교회역사의 현재성에 허점을 볼 수 있다. 그는 교회의 신령한 내면의 개혁과 변화는 시도했으나 교회의 구성체인 신자공동체(교회)의 현재성은 놓쳐버렸다.

루터는 변방의 무명 수도사로서 당시대의 교황권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상대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싸움을 했기에 개혁의 과정에서 두 손을 놓게 되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만났다.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서 카를5세 신성로마 황제의 심문을 받고 무사귀환의 약속에 따라서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종적을 감춘다.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익명으로 지낸 1년 가까이 루터는 독일에 신약성경 번역은 물론 로마 가톨릭과의 사상전쟁 승리를 위한 집필 등으로 성숙한 위치에 오르면서 16세기 종교개혁가의 영웅적 위치에 오른다.

그러나 루터의 개혁운동이 유럽 사회에 정착해가는 1525년도에 돌발사태 두 개가 터져 나왔다. 하나는 취리히 쯔빙글리 문하에서 나타난 재세례파 운동이 개혁운동을 위협할 때 이를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또 하나는 농민반란에 대한 루터의 갈팡질팡하는 자세였다.

농민반란은 루터의 개혁운동의 핵심인 ‘만인제사론’에 고무된 독일의 농노들이 루터의 인도를 따라서 영주계급과 지주들을 향해 공격해 갈 때 초기에는 루터가 앞장섰었다. 루터는 농민들을 노예로 부리는 영주들과 지주들을 향해 미치광이, 어리석은 광인들, 인민의 고혈을 짜는 흡혈귀, 깡패, 세금 수탈자들이라는 말을 많이 했었다.

농민들은 루터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영주와 지주들을 향한 저주문을 듣고 분노를 키웠는데 농민들이 튀빙겐의 수도원 70개, 프랑켄의 성 293개를 불태운 뒤로 농민운동의 과격성을 지적하고 만류하다가 어느 날부터는 루터가 영주계급의 앞잡이가 되어 영주와 지주계급을 향해 퍼붓던 저주문을 농민들을 향해 외치고, 심지어 혈서까지 써 보내면서 농민반란군 진압의 선봉에 섰고, 1525년 7월에는 10만 명의 농민군을 진멸시키는 비극에 앞장서고 말았다.

그보다 한 달 전 루터는 시토 수녀회 출신 수녀들 9명이 비텐베르크로 피난해 왔는데, 그들 중 카타리나 보라와 결혼한 뒤 유럽의 기독교 역사의 진보를 위해서는 손을 쓰지 못했다.
루터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톨릭과의 분립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고,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기정사실화 된 후에도 가톨릭을 떠난 프로테스탄트 신자 공동체의 대안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16세기 개혁자들만 쳐다보는 세계에 흩어진 신자공동체는 21세기 현재에도 목자 없는 양떼들 꼴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한 사람 몫 이상으로 크게 활동한 루터와 16세기 개혁자들에게 오늘 세계 기독교의 현실을 책임지라고 하지 않는다. 또 앞서 말한 루터의 농민반란 진압과정의 실수나 판단착오, 또 그의 동지요 제자이기도 한 토마스 뮌쩌가 농민군 8천명을 이끌고 농민운동에 뛰어들었으나 루터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화형장의 불길 속에 묻혀버린 일도 루터에게 책임을 돌리려 하지 않는다. 재세례파의 문제 등까지도 인간의 한계성을 가진 16세기 개혁자들에게 짐을 지우려 하지 않는다.

16세기에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그리고 만인제사 문제에까지도 접근했던 그들 개혁자들의 혁명적 용기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오늘의 기독교가 세계성을 상실하고 구심력을 갖추지 못해 끝없이 교파가 난립하고 개교회주의적 현상 속에서 허덕이는 현실을 루터와 그 동지들에게 떠넘길 수는 없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다가 1년에서 1개월 모자랄 때인 1523년 4월에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레오10세 교황이 죽기 전에는 숨어서 살아야 할 줄 알았으나 교황은 유럽의 곳곳에서 교황권이 무너지고 있는 속에서 루터를 잡아서 죽여도 개혁의 불길을 잡을 수 없으니 루터 문제를 포기한다.

신성로마제국 카를5세도 프랑스와즈1세가 버티는 프랑스와의 7년 전쟁 중에 루터에게 더는 손쓸 겨를이 없어졌다. 루터는 더 이상 쫓기는 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교황이나 카를5세 황제에 못지않은 위엄과 권세를 가진 유럽 종교개혁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있었다. 교회공동체를 어떻게 이끌고 가야 하나? 로마 가톨릭과 분립을 생각하지 않았던 루터에게 있어서 유럽 기독교(가톨릭 포함)가 두 개가 되어버렸으니 낭패였다.

루터는 핍박이 끝난 뒤 비텐베르크 예배당에서 예배를 인도할 때 상당기간 사제복을 벗지 못했다. 루터 파의 성찬론을 보아도 가톨릭과 유사한 변체론을 주장하고 있음을 볼 때 루터는 교회론의 개혁대안은 미완의 한계에 있었다고 본다. 또 그의 생애 동안 신자 공동체의 중앙집권적 세계성에 대한 답안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우주적 또는 세계적 교회론을 신령한 형식으로만 가능하다는 억지를 부릴 수 없다. 교회는 현실이다. 교황권은 국가적 지배권 또는 지상권 위에 군림하지 않아도 세계적인 유일체제가 가능한데 신교 기독교는 왜 세계교회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는가? 무엇이 못미더워서 세계를 하나의 단일조직체로 만들어갈 수 없는가? 그렇다면 지상교회는 하늘나라의 원형에 편입이 불가하다는 것인가?

로마 가톨릭에서는 지상권 장악 없이도 목회일방으로도 세계성을 가지면 교황권이 그리스도의 사역 대행자로 활동이 가능한데 기독교는 언제까지 신자공동체로서의 완전성을 획득하는 교회시대의 모색이 미뤄져야 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아닐 수 없다. 논리나 조직 원리로 가능한 일인데 왜 현실에서는 외면되고 있는지, 기독교 신교는 스스로 깊은 고민을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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