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십 수 년 전, 처음 아이에게 물건 사오는 심부름을 시켰던 기억이 생생하다. 너도 이제 많이 컸으니 혼자 슈퍼에서 우유를 사오라고 보냈다. 아이는 호기롭게 돈을 받아들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정작 마음이 불안했던 것은 아빠인 나였다. 보내놓고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뒤따라 집을 나서 아이의 뒤를 밟았다. 그 뒷모습이 어찌나 위태롭고 애틋하던지. 그러다 아이에게 미행이 들키고 말았는데, 그때의 장면, 시간, 분위기도 눈에 선하다.

아이가 스스로 살아갈 힘을 갖춘 독립적인 존재로 키워야 한다는 당위와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 이 둘이 늘 대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로서 내 마음의 주도권을 놓고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싸움의 승자는 정해져있고,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아이는 독립적으로 자라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내가 지켜주고 보호해줄 수 있는 부분이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때 나를 세상에서 제일 힘센 사람인 줄 알았던 아이가 자라가면서 생각보다 크지도 강하지도 지혜롭지도 않은 아빠의 실체를 알게 되는 것이 살짝 아쉬운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요 다행한 일이다.

그 아이가 커서 수능을 치렀다. 쉽지 않았을 그 시간을 아이는 치열하게 살아냈고 시험은 끝났다. 이제는 그 결과를 놓고 원서를 넣는 일만 남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 몇 년 있으면 아이가 정말 사회로 나가 세상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하는구나, 이제야말로 정말 부모로서 기도해야 할 때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고, 또다시 짠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의 고등학교 시절, 특히 고3 수험시절을 지켜보며, 또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음이 새삼 사무치게 다가왔다. 아이가 세상의 풍파를 겪지 않게 막아줄 능력을 갖고 있었다면 이런 기분이 훨씬 덜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새 전 국민을 분노하게 만든 최 모 씨를 보면서 내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그 사람은 권력과 재력 면에서 부모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있었다. 아이가 학교를 안 가도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게 해주고, 순전히 그 아이의 체육활동을 위해 대기업 여러 곳의 팔을 비틀어 지원까지 받아내는 슈퍼파워를 과시했다.

그런데 그런 권력을 가지고도 최 씨는 아이와 함께 교회에 가서 헌금하고 신에게 기도하고 감사했다.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던 사람이 신 앞에 자신의 문제를 아뢰고 감사하는 모습이 처음에는 낯설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권력의 정점에 있었기에 오히려 인간의 권력이 가진 한계를 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권력은 결과를 백퍼센트 보장할 수 없고 인간의 힘을 벗어난 변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이는 기독교에 귀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권력이라는 것이 한계가 분명하구나, 인간이 가진 최고의 것조차 이렇게 부족하기 그지없구나, 더 높으신 분의 뜻에 순종하고 살아야겠구나, 하면서.

하지만 그이는 자신이 가진 것(그것만도 너무 많았다!)을 꽉 붙든 채, 자신의 권력과 재력으로 보장받을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만 신이 덤으로 채워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것도 신앙이긴 하지만 기독교의 탈을 쓴 무속신앙이리라.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윤리(순종) 없는 종교, 희생 없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이를 통해 상당수의 부모들이 힘이 부쳐서 실현하지 못했을 뿐 마음 깊숙이 품고 있던 욕망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이가 모성애의 탈을 쓰고 저지른 온갖 범법은 추악했다. 덕분에 전 국민, 특히 부모들은 자신의 욕망이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폭주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생하게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의 지향이 그이와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섬뜩한 마음과 함께 안도감이 든다. 아무래도 부모로서 나의 한계, 내게 주어진 브레이크를 축복으로 여겨야 할 모양이다. 그것이 아이가 참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성장하고, 하나님을 진실로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로 들어설 최소한의 조건인 듯하기에.

홍종락 / 번역가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