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는 이신칭의,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고 했다. 이는 바울의 로마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법칙을 창안했으나 계시로 받은 것은 아니다. 바울보다 2천여 년 쯤 이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저가 하나님을 믿으매(하나님께서) 이를 의로 여기셨다(창 15:6, 약 2:23).

일단, 우리는 중세기 1천여 년 간 행위 우선 신앙에 본말이 뒤집어진 16세기 초 마르틴 루터의 저돌적인 도전은 세계교회사의 큰 획을 그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신앙과 신학의 틀을 마련했음을 존중한다.

하지만 신앙은 “믿음”만으로 완성이 안 된다. 물론 개개인의 신앙은 완성도가 가능하다. 그러나 신앙은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럿이 집단을 이루고, 끝내는 전체 공동체 곧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지체의 완성도가 있어야 한다.

마르틴 루터는 이신칭의를 확보했으나 또 하나의 고민에 빠졌다. 자기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가톨릭 공동체에서 떠나야 한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루터는 개혁운동을 시작한 이후 가톨릭을 떠난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다. 가톨릭 안에서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교황권만 쫓아내고 “교회 총회”권을 통해서 개인의 신앙과 만국교회가 하나라는 가톨릭의 불문율을 지켜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의 1차 과정이 성공되어 가자 그 스스로가 가톨릭을 떠나야 했었다. 루터 신학에서는 그때까지만해도 별도의 교회론이 없었다. 그는 1525년 이후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어떻게 일체감, 곧 하나와 전체 또 전체 속에서 보호받아야 할 “하나”의 실체를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안이 없었다.

만약 루터가 “교회는 하나”여야 한다는 신앙의 확신을 가졌다면 종교개혁기 투톱 중 한 사람인 쮜리히의 쯔빙글리와 “성찬론 시비” 하나로 등을 돌리는 졸수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무릇 천하를 도모하자면 온 세상이 나를 돕는다 해도 외로운 법임을 루터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가 주장하는 “변체설”과 쯔빙글리의 “상징설”이 프로테스탄트의 성찬론에서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 정도의 고민으로 교회가 어떻게 가톨릭의 조직교회 완성도를 따라 잡는가? 여기에 루터의 개혁운동의 절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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