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 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천년여행 [ 202 ]

바람이 분다. 북방의 바람이 생각보다 거세게 분다. 대당 제국이 무너지고, 위구르 유목제국이 무너진 후 북방 역사의 강자로 등장한 거란이 또 무너진다. 8대조 할아버지 야율 아보기가 세운 제국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야율 대석은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에 대해서 답을 찾지 못했다. 북방 초원의 제왕이요 정주지역까지 아우르는 유목과 농경을 동시 경영해온 거란 제국 한자 표기로는 계단(契丹)이요 그들이 아끼는 국명은 키탄(Qitan) 또는 키타이(Qitay) 이다. 중국식 국명으로 정착한 요(遼) 제국이 되어 마치 중국 역사를 이어가는 듯 제국의 한 시대를 열었었는데….

당나라 이후 최대 제국이 무너졌다. 대석은 생각해 본다. 동으로는 발해 만에서 서로는 저 멀리 타클라마칸 사막이요 북으로는 케룰렌 강에서 남으로는 현재 북경 남쪽으로까지 뻗은 사방 만리가 훨씬 더 되는 광역의 제국, 행정제도로도 동경·서경·남경·상경, 그 중심에 중경이 자리 잡은 이 제국을 어느 누가 집어삼키려 든다는 것인가.

야율 대석은 자기네 제국을 침탈해 들어온 말갈인들의 집단, 금나라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당장 달려가서 제압하고 싶지만 자기에게는 실권이 없다. 군대도 없다.

황제는 목숨을 구걸하려 드는지 투항의 시기만 조율하고 있다. 피붙이인 자기의 피 끓는 자존심은 한 푼어치도 생각해주지 않았다. 야율은 말없이 자기를 지켜보는 듯한 달빛 아래서 큰 기침을 몇 번 해보았으나 잠 설치게 한다고 투덜대는 듯한 날짐승들의 몸 뒤채는 소리뿐이다.

밤잠 이룰 수 없는 대석의 눈앞에 타클라마칸 사막의 성벽 국가들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이게 왠일인가 싶어서 무릎을 쳤다. 위구르 제국의 잔존 세력이 타클라마칸 사막 중심으로 하서 위구르, 천산 위구르족들 세력이 만만치 않다. 더구나 카라한 왕조 역시 야율 아보기의 8대손인 야율 대석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이미 심장이 멎은 시신처럼 조상의 나라 요제국은 점령국 금나라와 행정 교체기 마무리 단계인데 그가 쉽게 움직일 수 있을까. 그는 현제 서경과 흥경부 중간지인 천덕군에 머물고 있다. 그가 움직일 때 동행할 수 있는 부하들이 많지 않았다. 믿을 수 있고 담력이 좋은 10명 이내의 군사만을 선별했다. 가까운 날을 선택해 인산산맥의 험준한 골짜기만을 골라서 몽골 초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툴라 강 상류에는 과거 위구르 제국의 주요 방어진이었던 카툰성이 있다. 지금은 진주 건안군 절도사 방어진지가 있는 것으로 야율 대석은 알고 있다.

고비 사막을 건너 카툰성이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서 대석은 숨을 고르며 참모들과 의논했다.
“어찌 하겠느냐?”

믿도 끝도 없이 허공에 내지른 그의 한마디는 성난 사자의 포효 같기도 했다. 부하들은 움찔했다. 생명을 같이 하기로 다짐한 동맹인데도 신분이 신분인 이상 주눅이 들었다. 대석은 어릴 때부터 제국을 지탱하고 번영해 갈 왕제로 소문이 났었다. 그러나 그는 나이 많은 삼촌에게 황위를 양보하고 차기를 내다보는 통큰 황자였다. 그래서 그가 황위에 있었다면 금나라에게 제국을 넘기는 치욕은 없었을 것이라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대석은 어찌하겠느냐, 고 더는 묻지 않았다. 카툰성 안에는 2만여 명의 요제국 패전군들이 있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이 과연 야율 대석이 나타나면 어떻게 행동할까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어찌하겠느냐, 고 꽥 고함을 허공에 내지른 야율이었다.

야율은 근처 움막으로 부하들을 불렀다. 동굴은 아니지만 10여 명이 들어가도 지표면 위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동굴 같은 웅덩이였다.

“한숨들 자거라. 꿈을 꾸거라. 나도 마찬가지다.”
대석은 한쪽으로 가서 몸을 웅크리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른 부하들도 몸을 아무렇게나 내던지는 겉옷처럼 눕히고 말이 없었다. 그들 중 한 사람 을지고가 웅크리고 엎드려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 시간쯤 후, 을지고가 야율 대석을 깨웠다.
“폐하, 황제 폐하!”
“뭐,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지?”
야율 대석이 을지고에게 다그치듯이 물었다.
“폐하! 왜 그러시나이까?”
을지고는 정색하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부하들도 야율 대석을 둘러싸고 눈을 두리번거렸다.

“이 사람, 을지고! 날더러 왕제라고 했나?”
“네, 폐하.”
“이 사람이 무슨 소리야.”
대석은 말하면서도 눈길이 부드러웠다. 나쁘다 할 것이 없지 않은가.
“황자께서는 인산산맥을 넘는 순간 요제국의 재건 황제이셨습니다. 창건 황제 야율 아보기 님의 웅지를 다시금 펴시고 잃어버린 북방 초원은 물론 당나라의 옛 땅까지 황제께서 다시 수복하셔야 합니다. 황제 폐하! 유념하시옵소서.”
“그래, 그래. 너의 그 배짱을 내가 소중히 하마. 그런데 왜 갑자기 날더러 황제라고 했느나? 무슨 징조라도 발견했더냐?”

“네, 폐하. 제가 잠시 전 꿈을 꾸었는데 야율 아보기 태조께서 카툰성으로 바로 가지 말고, 인근의 7개 성 성주들과 회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맞다. 태조 할아버지가 나보다 너를 아끼시는구나. 그 말씀이 틀림없다.”
야율 대석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을지고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모두들 일어나라.”

야율 대석은 카툰성을 되도록이면 멀리 우회해 지방 성주들을 소집했다.
지방 성주 7명은 하나같이 달려왔다. 그들은 야율 대석의 등장에 모두 자신감을 가졌다. 그들은 휘하 현청의 18개 수령들까지 불러 야율 대석 앞에 나타났다. 매우 신속한 대처였다. 이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야율 대석은 일장 연설을 했다.

“여러분, 내가 여러분의 이 같은 열정과 제국 재건에 대한 소원을 어찌 알았으리까. 이는 여러분의 이 같은 거란 제국의 탈환을 향한 열정을 하늘의 신이 아시고 나를 여러분에게로 달려오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열심히 카툰성 군부에서도 곧 좋은 소식이 오리라고 봅니다.”

대석의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카툰성 군사령관이 달려왔다. 혹시나 하는 우려 때문에 성으로 직접 찾아가지 않았던 조심스런 접근이 효력을 보았다. 얼마 후에 드러난 바에 의하면 야율 대석이 카툰성으로 곧바로 뛰어들었을 경우 자칫 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다. 군사령부를 우회해 지방관들을 설득시키고, 또 그들에게 거린 제국의 본토를 탈환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과정에서 카툰성 군부 실력자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카툰성 군세는 불과 5천여 명뿐이었다. 그러나 홀몸이나 다를 바 없이 달려온 야율 대석은 자신감이 있었다. 민심의 흐름을 보았다. 그들 주변에는 위구르인의 세력은 물론 돌궐인들, 거란인들, 중국인들 족보를 더 파고들면 본디 강력한 동방의 장자였던 고구려의 후손들까지 뒤섞여 일종의 떠돌이들이 강한 지도자를 찾고 있다는 점이다.

3년쯤 지나자 야율 대석 휘하에는 2만여 명의 군사들이 결집되었다. 군 지원자들이 모여드는 족족 훈련을 시켰다. 작은 군사력이라고 주눅들 필요 없었다. 일당백(一當百)이다. 하나가 백 명을 상대할 수 있는 강군을 목표로 다소 지나치다 할 만큼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 야율 자신도 부하들과 같이 뛰고 달렸다.

“이렇게 하는 것이다. 나도 너희와 같이 먹고 같이 훈련한다. 우리 거란 제국은 콧대 높았던 당나라 군대와 북방의 유목민들을 한 조직 속에서 어울리게 했었다. 그 힘으로 단숨에 대제국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유목민과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는 정주민들을 하나의 구성체로 만들었다. 우리도 지금 현재는 사실상 유목 집단의 풍습에 젖은 군대이지만 하나가 또 하나를 받아들이려면 절반의 기득권을 양보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본토에서 서쪽으로 이동해 와 있다. 당장은 우리 앞에 우리와 실력이 비슷한 민족들이 버티고 있다. 당장은 세력이 작아 보이는 패망한 종족인 듯하지만 위구르 민족을 쉽게 생각해서는안 된다. 우리들 발밑 지역에는 하서 위구르가 상당한 세력으로 웅크리고 있다.

천산 위구르 역시 험준한 산악을 이용한 은패생활을 하고 있기에 세력의 실세를 다 모른다. 더구나 그들은 소그드 상인 세력들의 자본과 마니교를 국교로 하는 정신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뿐인가. 돌궐 민족의 한 갈레인 셀죽 투르크는 국가조직을 가지고 우리 갈 길을 막고 있다. 또 카라한국 역시 투르크 유목민들이지만 그들은 이슬람 종교의 지원세력을 보유하고 있다. 카라한 왕조는 알리와 하산의 형제국으로 카라한과 가즈나 왕조가 일종의복수국가로서 이중적 장벽을 갖춘 강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겁먹지 마라! 우리는 당나라와 북방 유목세력의 조화를 이룬 강력한 정신력을 지닌 제국의 아들들이다. 알겠느냐!”
야율 대석의 해박한 상황파악과 순발력은 큰 감동이었다. 부형 앞으로 나아갈 진로에 대한 자신감을 확인한 후 카툰성의 결의는 충천했다. 야율의 대장정은 1130년 3월에 2만여 명의 군사로 출정했다. 그들은 카툰성을 떠나 북방의 예니세이 강 유역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시, 그들은 서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목표하는 성체는 에밀이었다. 조그마한 성이었다. 드디어 그들은 최초의 국가 단위의 기본형을 갖춘 것이다.

작가 조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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