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은성 교수
총신대학교, 역사신학

지난해 4~11월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념하기 위해, 반세기가 지난 종교개혁을 기념하기 위한 준비로 바빴다. 한국교회도 여러 단체에서 기획과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고무적인 일이다. 난 역사신학자로서 지나온 역사에서 진행했던 사건들과 기념들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를 떠올린다.

먼저, 지난 반세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5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어떤 자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희박해졌다고 하거나 실패했다고까지 염세적인 말을 하곤 한다. 인정한다. 이런 평가를 내리는 이유 역시 종교개혁이 인류 역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뭐라 하던 그 의미는 크고 크다. 하지만 현재에 와서 그 의미를 실천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든 아니라고 대답한다. 당연한 답변이다. 그 이유는 종교개혁의 의미를 500년 동안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생명 내걸고 진리를 재발견하며 싸웠지만 우리는 그런 희생과 절실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재발견했던 진리를 우리는 파악하지 못하기에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평가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

중세교회 역사를 살펴야 하는 이유는?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배우고 경계심을 가지는 데 있다. 현재 한국교회는 중세교회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픈 마음이 간절하지만 사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개혁에서 재발견된 진리를 간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혹자는 기원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렇다! 이것은 500년 동안 반복했던 슬로건이다. 또 오직 성경이다! 그리고 오직 은혜이다! 이것을 가리켜 흔히 3솔라(3 solas)라고 부른다. 이것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 모두가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편하게 들리겠지만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조차 우리는 “개신교”라고 수정하여 부른다.

개신교는 무슨 의미일까? 천주교의 후예라는 뜻인가? 아니면 구교에 대한 상대적 용어인가? 우리 스스로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데 무슨 종교개혁의 정신을 잇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개신교는 없다. 이 용어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원하는 것이다. 이 용어를 사용하는 자들은 로마 가톨릭이든지 아니면 겉으로는 프로테스탄트이지만 안으로는 로마 가톨릭주의를 신봉하고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한국교회가 간과하고 있는 진리, 즉 교회관이다. 80년대부터 성장위주로 치달으면서 한국교회는 교회관이 무너졌다. 종교개혁 당시 반드시 따랐던 진리는 교회관이었다. 그들이 종교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교회관에서 나왔다. 단순히 칭의론을 재발견했기에 결렬한 것만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회가 아니라는 분명하고 확고한 신학을 지니고 있었다. 교회가 아니니까 떠날 수 있었다.

현재 한국교회는 과연 참된 교회인가?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인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분의 지체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가 교회들마다 힘들 것이다. 종교개혁의 반세기를 맞이해서 한국교회가 그 정신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또는 실천하려면 반드시 그들의 교회관을 찾아야 한다. 그 관점으로 한국교회를 보면, 그 허상과 실상이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교회의 본질적인 의미가 뭔지 파악해 그것에서부터 존재의 이유를 찾아 부단히 변질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변화를 받아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할 것이다(롬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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