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 평화농원의 ‘제1호 평화하우스’에 선정된 고려인 최소망 할머니의 신앙과 삶

강제이주 후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고아로 산 척박한 삶…
“죽지 않고 산 건 하나님 덕분”

56년간의 교직 정년퇴임 후 집 개방해 나그네들 섬겨

 

 

▲ 최소망 할머니

“러시아 오면 꼭 내 집에 오소. 우리 집엔 밥 많고 쉴 자리 있으니 시름 놓고 오시오. 그럼 내가 음매 반갑고 반갑겠소.”

분명히 한국인의 얼굴이고 우리말인데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그래도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나 80여년을 러시아에서 살아온 최소망 할머니(83)는 “여기 앉은 사람들 나랑 얼굴 같아 가슴이 너무 기쁘고 기쁘다”며 절반만 통하는 말로 벅찬 감격을 쏟아냈다. 말이 안 통하면 어떤가. 내 조국, 내 형제들인 것을.

협동조합 평화농원(이사장 김희진)으로부터 ‘제1호 평화하우스’에 선정되어 1월 18일 서울북한산성교회에서 가진 평화하우스 현판 수여식에 주인공으로 참석한 최소망 할머니는 이날 모인 사람들 모두를 러시아 연해주 우스리스크 하롤의 자기 집으로 초청했다. “내 집은 하나님 거니까 당신들 집이기도 하오” 하며 꼭 오라고 신신당부다.

# 내 집은 하나님 집, 그리고 당신의 집

협동조합 평화농원은 분단시대 통일 한국을 염원하며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한의 교집합이 이뤄지는 제3지대인 러시아 연해주에 평화 정착을 위한 상생의 모델로서 평화농원을 세워나가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이 지역에서 평화의 뜻을 품은 이들의 연대를 위해 ‘평화하우스’ 운동을 시작, 오랜 세월 자신의 집을 개방해 나그네들을 섬겨온 최소망 할머니 집을 첫 번째 평화하우스로 선정한 것이다. 평화농원은 이날 평화하우스 현판과 오래돼 낙후된 집을 보수할 수 있도록 리모델링 비용을 최 할머니에게 전달했다.

올해는 고려인 강제이주 80년이 되는 해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최 할머니는 부모님과 2살에 강제이주 당했고, 그 이듬해까지 1만5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할머니의 부모님도 그때 돌아가셨다.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 일본의 침략을 피해 건너간 1863년부터였다. 이들은 농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정착했고,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으로 독립운동의 요충지가 되기도 했다. 스탈린의 분리·차별정책으로 연해주의 한인들이 유대인·체첸인 등 소수민족들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것은 1937년 9월 9일부터 10월 말까지의 일이다.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황무지에 내팽개쳐진 사람들, 당시 고려인 수는 17만 5천여 명으로 이 과정에서 1만1천여 명이 도중에 숨졌다. 그런 속에서 어린아이가 부모도 없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 험한 세월을 어떻게 견뎌냈냐는 말에 최 할머니는 씩씩하고 밝기만 하던 모습이 가시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거지로 빌어먹고 살았지. 빵을 주면 먹고 없으면 배고프고. 송아지들 틈에 끼어서 자기도 하고. 밤에 갈 곳 없어 무서워 하늘 보며 울면 지나던 사람이 자기 집으로 데려가 머물게 했어. 이제는 우리 집 오는 사람이 주인처럼 편안하게 지내도록 하는 게 내 할 일이지.”

강제이주 후 이웃을 통해 할머니의 손에 쥐어진 건 ‘이 아이는 경주 최 씨이니 그 집안에 시집가서는 안 된다’는 간단한 내용의 메모지였다. 정확한 이름도, 생년월일도 없었다. 최 씨인 것은 확실하니 자신의 이름을 ‘소망’이라고 지었다. 그는 그렇게 삶에서 소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 하늘의 별은 늘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삶에 벗이 되어주었다. 갈 곳 없어 막막할 때면 하늘을 바라보며 한없이 울었다. 그럼 또 하루를 버텨낼 용기가 생기고, 운 좋은 날은 마음씨 넉넉한 이의 집에서 며칠을 지낼 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 누구나 구차하게 살던 때 어린 것이 목숨 부지할 수 있었던 건 모두 “하나님 덕분”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내가 어릴 때 하늘 보며 찾았던 분과 같았다. 성경에 하나님은 부모 없어 우는 아해(아이)들, 남편 잃고 고생하는 여자들을 돌본다고 했다. 나에게는 늘 그런 하나님이었다.”

 

▲ 교직 당시 러시아 학생들과 함께 한 최소망 할머니. 뒤에서 두 번째 줄 왼쪽 다섯 번째.

 

# 고아의 삶 지켜주신 ‘하나님’

최 할머니는 어떤 호칭보다 ‘선생님’이 익숙하다. 의지할 곳 없는 불안한 삶이었지만 공부를 놓지 않고 대학까지 마쳤다. 사회주의 국가라 무료로 공부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학교에서 56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러시아 정부로부터 최고의 교사로 선정돼 훈장을 받았다. 그 비결에 대해 묻자 최 할머니는 “사랑”이라고 했다.

“수업 시간에 대답 안하는 아해에게 다른 교사는 ‘나가라’ 했지만 나는 대답 못할 때마다 혼내지 않고 볼에 뽀뽀해 주었다. 그 아해가 자라 왜 나를 유급시키지 않았냐고 물었다. 내가 말했다. 네 눈이 나는 바보가 아니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 아해 지금은 국제적인 일 하는 사람이 됐다. 나까지 쫓아냈더라면 귀한 사람 하나 잃었겠지.”

최 할머니가 나그네들을 자기 집에서 섬기기 시작한 건 정년퇴임 후인 77세 때부터였다. 학자로서 대학교 총장까지 지낸 남편은 16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죽었고, 두 딸도 출가해 가정을 이루고 사니 집에는 최 할머니 혼자 남았다. 그때부터 식사 시간이면 밥을 넉넉하게 지어놓고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식사했다. 갈 곳이 없다면 며칠이고 편히 지내도록 했다. 돈은 받지 않는다. 그래도 교직 정년퇴임으로 받는 연금이 있기에 문제없다고 했다.

“신앙이란 곁에 있는 사람 구차하든지 잘 살든지 사랑하는 거지. 돈을 좋아하고 자꾸 받으면 다음엔 우리 집에 어찌 오겠나.”

그렇게 섬겨온 것이 입소문이 나 그동안 최 할머니 집을 거쳐 간 각국의 학생들이 200명이 넘는다. 그들에게 열심히 러시아어를 가르쳐주었고, 한국인들에게는 말과 글을 배웠다. 최 할머니에게 제2의 인생이 열린 것이다.

이번에 한국에 오게 된 것도 평화농원 행사뿐 아니라 최 할머니 집에서 8년간 함께 지낸 현준이(가명)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현준이는 한국에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러시아로 온 유학생이었다.

“한 번은 현준이가 러시아인 동급생 가슴을 발로 찼어. 공부하기도 싫어하고. 마음먹고 매를 들었지. 현준이가 ‘그때 소망이 내 엉덩이 안 때렸다면 오늘의 나 없었을 거다’라고 결혼식에서 말해주어 기뻤어.”

# 그리운 조국, 그러나…

“여기 최 씨 있나요? 나 경주 최 씨입니다. 누구 없어요?”

혹여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일까. 최 할머니는 자꾸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다가가 ‘경주 최 씨’가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말투가 어색한 할머니의 등장에 놀라고 이내 무표정이다. 최 할머니는 그동안 네 차례 한국 땅을 밟았다. 꿈에도 그리운 조국이지만 한국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건 거리뿐 아니라 사람간의 간격도 너무 멀다는 것이다.

최 할머니는 “고향 잃어버리고 슬퍼하는 고려인들이 많다”면서 “내 나라”에 마음 놓고 찾아올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또 자신이 살고 있는 연해주 땅에서 평화통일의 물꼬가 트이기를 소망했다.
최 할머니는 1월 10일 입국해 일정을 마치고 24일 러시아 연해주로 돌아갔다.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