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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제국을 다시 일으킨다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천년여행 [202] / 사제 왕 요한 ④
조효근  |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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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호] 승인 2017.02.15  15: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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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난주의 한 사원 건물을 한국 여행자들이 돌아보고 있다.

 

야율 대석은 8대조 할아버지인 야율 아보기가 무너지는 당나라의 뒤를 이어 거란제국을 일으킬 때의 역사 이야기를 떠올렸다. 제국의 기반은 인재와 자금이다.

태조 야율 아보기는 AD 907년 천황제(天皇帝)에 즉위하여 AD 926년 발해를 정복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발해의 수도 홀한성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장자를 왕으로 세운 후 아보기는 돌아오는 길에 병사하고 말았다. 그의 후계는 둘째 아들인 야율 덕광(태종)이 맡아서 사방으로 영토를 넓히니 드디어 제국의 틀을 만들게 되었다.

<요사>의 기록을 떠올리면서 야율 대석은 야율 덕광 할아버지의 기개를 특별히 본받고 싶었다. 창업주인 8대조 야율 아보기는 맨주먹으로 제국을 일으킨 어른으로 본받는다거나 감히 흉내 낸다 할 수 없으며 다만 우러르는 것으로 만족하고 발해 공략의 선봉에 섰음은 물론 어느덧 휘하에 대군을 거느리게 된 덕광 할아버지는 후당(後唐)의 하동절도사 석경당의 반란을 도와 그의 권력을 지켜주고 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으며, 그 나라를 후진(後晋)이라 명해 주었다. 야율 덕광은 그 대가로 장성 이남 연윤 십육 주를 선물로 받고 후진과 군신관계까지 맺으며 매년 황금 30만 냥을 조공으로 받아서 막대한 재원을 마련했다.

여기까지, 대석은 조상들이 제국을 창업하던 초기를 떠올리면서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 을지고가 소집해온 예수를 믿는다는 지원군들 중 쓸 만한 재목은 얼마나 될까? 그는 서경을 떠나 인산산맥을 거슬러 고비사막을 지나서 마치 야반도주하다시피 처신했으나 지금은 휘하에 2만여 명의 군사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두 어깨가 매우 무겁다.

야율 대석은 오래 지체하지는 않았다. 부대를 양분했다. 1군은 발라사군 지역으로, 2군은 투루판 지역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출진 전에 투루판 행 2군이 출진을 서두르는데 투루판 지역의 지원군이 에밀에 당도했다. 약 1천여 명의 병사들이었다. 그들 병사를 이끄는 지휘관은 을지고였다. 을지고는 전군 사령부로 달려갔다.

“폐하, 소인 을지고가 기독교 부흥군을 이끌고 왔습니다.”

을지고는 거란군 군사참모들이 모여 있는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고 총사령관인 황제 야율 대석을 향하여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감격으로 들떠있었다. 야율 대석이 달려 나왔다.

“을지고 일어나라! 수고했노라.”

을지고는 투루판 지역의 수도사들은 물론 이동 상인들과 인근 작은 도시의 젊은이들도 불러 모아서 거란의 부흥군에 합류시켰다. 다음날은 쿠처국에서도 5백여 명의 기독교 지원군이 당도했다. 야율 대석은 기뻤다. 더 기뻐할 일이 연거푸 생겨났다. 거란의 대군이 집결한 에밀을 향해 주변 도시들에서 촌장들이 지지를 선언하며 동맹을 결의했다. 카라한의 급습에 철군했던 날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야율 대석의 군사참모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민간지역의 4만호 정도가 거란국에 합류한 통계가 나왔다. 그들은 카라한 통치지역 사람들인데 카라한 제국이 야율 대석 등장으로 위축되어 천산산맥 저 너머 탈라스, 카트완, 부하라 지역으로 중심 이동을 했다는 정보가 있었다.

“폐하, 이 또한 카라한의 복병 전략의 또 다른 술수인지도 모릅니다. 유념해 주소서.”

을지고의 충언이었다.
“그래, 나도 생각하는 바가 있다. 우리는 분위기에 들뜰 필요가 없다. 내일부터 보름동안 군사훈련을 하겠다. 먼저 군사들이 날렵해야 한다. 오늘부터 군량미 아끼지 말고 양과 소를 잡아 군사들에게 배부르게 먹게 하라.”

야율은 명령을 내리고 군막들을 찾아갔다. 군사들 한사람 또 한사람을 세밀하게 살피고, 마음에 근심이 있거나 혹시 질병으로 고생하는 군사들이 있는가를 세심히 살폈다. 군사훈련이 계속되는 15일 동안 야율 대석은 병사들 거의 모두를 살피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소년병들과 부상당한 병사들을 따로 관리했다.

훈련기간이 끝난 후, 군제를 1,2,3군으로 나눴다. 좌군 우군 그리고 중앙군이다. 중앙군은 야율 대석이 직접 지휘하고 대석의 조카인 야율 직고에게 좌군을 맡기고 우군은 대석의 친구인 석로탁 장군이 맡도록 했다. 황제군 휘하에 기독교부대, 여성부대, 의무부대, 예비군 부대를 두고 책임자로 을지고를 임명했다. 일종의 특별(직할)부대다.

기독교부대는 기독교라는 용어를 겉으로는 쓰지 않기로 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특성상 기독교, 불교,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도교, 유교까지도 당시로서는 종교 간의 갈등이나 견제를 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기독교 신자들이 돌출행동을 하거나 부대 이름을 강조하는 것은 부대의 사기에도 좋지 않다는 을지고의 제안을 황제인 야율 대석이 받아들였다. 여성부대는 을지고의 아내인 나비소가 맡았다.

구르칸(황제) 등극식을 마친 거란 부흥군은 자신감을 가지고 우군이 출진해 쿠처 방향으로 이동해 군진을 설치하도록 했다. 좌군의 야율 직고가 탈라스 지역으로 출정하고 황제군인 중앙군은 쿠처와 탈라스 중간지역으로 은밀하게 이동했다.

야율 대석은 좌군인 야율 직고에게 중앙군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도록 지시했다. 우군이 쿠처에 진을 친 후 좌군을 천산산 비탈을 통해서 카쉬가르의 카라한 본진을 협공할 수 있는 후속 전력으로 대비하도록 했다. 잘하면 우군과 중앙군으로 카쉬가르를 공략하고 카라한이 사마르칸트 쪽으로 도망치려 할 때는 좌군이 추격하거나 복병처럼 치고 나갈 경우 카라한을 괴멸시킬 수 있다는 전략까지 야율 직고에게 귀띔해 주었다.

“을지고, 내 곁으로 오라. 여성부대가 참여하고 있는데 거친 야전에서 견딜 수 있을까?”

“네 폐하! 직접 남성들과 대등하게 전투할 수 있는 인원은 3백여 명이고, 그 나머지 5백여 명은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환자를 돌보게 하고, 곧 있을 전투 시에 발생하는 부상병을 돌보게 하면 됩니다. 앞으로는 여성부대 숫자를 열배 이상으로 늘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우리 군의 군복을 수리하고 추위를 견딜 수 있는 털옷을 만들기 위한 여성 노무부대도 5백여 명이 있습니다. 나이가 30대 이상의 중년들이 섞여 있지만 우리 군이 움직이는 데 결코 불편을 주지 않을 만큼 발 빠른 운동력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폐하, 반드시 우리는 카라한을 정복합니다. 어디 카라한뿐인가요. 카스피해나 흑해 지역까지도 우리 거란제국의 영토를 만들고 우리는 곧 바로 동로마까지 공략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대 말이 맞아요. 지금 동로마뿐 아니라 서로마, 통틀어 유럽 전체가 십자군 전쟁으로 시달리고 있더구먼. 자네가 내게 말해준대로 십자군과 사라센의 이슬람 군의 전술과 전략을 살펴보았지. 양쪽 다 특별한 병법이 없어요. 십자군 쪽 병기가 사라센보다 약간 우세해요. 사라센의 이슬람은 전술이 우리 거란군과 유사한 점이 있으나 그들은 우리들의 기동력을 당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지. 그러나 이 같은 외부적 요인이 승패를 가린다고 보지 않아요.”

“그렇습니다. 폐하. 부하 사랑이 지극한 폐하와 같은 어버이를 만난 우리 거란군을 저들은 당할 수가 없지요. 폐하, 저는 폐하가 우리 군사들 저 구석에 있는 자들까지 몸살을 하거나 상처를 입는 등 어려움에 있는 자들을 세심하게 살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치 자상한 어머니의 손길 같은 애정으로 군사들을 돌보시는 총사령관을 모신 군대를 이 세상은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 그 말이 맞아요. 허나 더 있지. 모든 개개인의 신앙과 그들의 영혼을 살피는 사제 노릇을 하고 있는 을지고가 또 저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고 있는 우리 군, 우리 거란제국을 어느 누가 당해낼꼬.”

“폐하, 황공무지로소이다. 어찌 이렇게 소인에게 몸 둘 바를 모르게 하시나이까.”

을지고는 야율 대석 앞에서 울다가 웃다가 마치 광대 같은 꼴을 하는 듯했다. 그는 황제 곁에서 한발 뒤로 물러서서 자기 위치로 가면서도 어른에게 칭찬 들은 어린아이처럼 껑충껑충 뛰고 있었다.

거란군은 쿠처에서 카쉬가르 쪽으로 접근해갔다. 거의 저항이 없었다. 카쉬가르 외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우군만으로 소규모 전투를 했다. 카라한 군대는 전면전을 원치 않는 것 같았다. 카쉬가르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으나 카라한 군이 없었다. 도시가 조용했다. 카라한 주력군이 야르칸트 지역과 파미르고원 쪽 험지로 철수했다는 정보도 있었다.

실제는 이렇다. 일차적으로 천산산 골짜기에 거주하는 위구르 세력이 야율 대석의 거란 부흥군에 투항했다는 불확실한 정보를 듣고, 카라한군의 주력을 이루고 있던 카를룩과 캉글리 계통의 유목민 부대가 카라한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카라한 제국의 주력군이 분열하면서 왕조 직할군은 철수하고 유목민 부대가 야율 대석의 정부군에게 투항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이슬람 쪽 자료에 의하면 카라한 왕조와 함께했던 투르크와 거란계에 가까운 종족들 천막(이동 주거지)이 1만 6천개가 있었는데 이들 세력의 대다수가 카라한 왕조에 불만을 품고 야율 대석의 정부군을 맞이했다고 전해온다.

야율 대석은 싱거운 전쟁과 전투 결과지만 우쭐하거나 방심하려 하지 않았단. 그는 카쉬가르에 진입하지 않고 일단 천산산 북방 발라사군으로 철수했다. 그는 그곳에 수도를 정했다. 10여년의 에밀 시대를 끝내고 제국의 틀을 만들어갈 기초기반을 이루었다는 안도를 했다.

때는 AD 1134년이었다. 카라한 왕조를 격퇴했다고는 하지만 카라한 왕조는 가만 두어도 무너질 듯한 노쇠한 세력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딪치지 않았던 셀주크 투르크 세력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셀주크 부족이 주도하는 투르크(돌궐) 세력이다. 투르크는 역사와 문화가 뛰어난 세력으로서 거란제국보다는 선진문화를 가졌다. 당나라와 정면승부 했고, 동로마 세력은 물론 유럽 기독교와 십자군 전쟁 주력군으로 정면 승부를 해낼 정도의 강력한 민족이다. 바로 그 셀주크 투르크와 마주보면서 기 싸움을 해야 하는 야율 대석의 신(新) 또는 후(後) 거란제국이기도 하다.

작가 조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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