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한국교회는 16세기 개혁 대상이었던 로마 가톨릭을 그대로 닮았다. 범죄의 강도는 몇 배 더 흉악하다는 어느 평가의 진단이 있다. 그러나 도덕성 문제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신칭의” 부분만큼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21세기 교회가 가질 수 있다. 다만 “이신칭의”의 마무리 절차가 부실하여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제멋대로라는 지적은 있다.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교리는 소중하지만, 그 나무는 열매로 알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충돌하기 때문에 보완해야 한다. 칼빈 같은 탁월한 학자는 믿음의 뒤를 따르는 행함도 제2차 은혜라고 했다는데, 칼빈의 제자들이 오히려 이신칭의를 맹신하여 교회의 수준을 저하시키는 기현상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국인의 지혜로운 잠언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구슬’이라는 말이 있다. “믿음”을 말하고 이신칭의를 말하지만 “믿음”은 그 열매를 요구한다. “믿음”이란 어휘는 계시어 해석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의어이다.

그래서 “믿습니다”는 “예수가 내게 계십니다. 나와 함께, 또 나의 생명의 주로 나의 심장이 되어주신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이신칭의에 대한 교리 정립은 되어 있으나 그것이 나와 어느 만큼 관계가 있는가는 당사자들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 16세기 개혁자들이 손도 대지 못한 개혁의 핵심은 무엇인가? 루터가 입만 뻥끗했다가 완패로 끝난 부분인 “만인제사장론”이다. 루터가 만인제사를 외쳤다가 독일의 농민 반란에 불을 붙였고, 처참한 비극으로 끝났고, 루터는 많은 부분 개혁자로 공헌했으면서도 농민반란 세력을 학대하고 그들 수십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죄를 벗어날 수 없다.

또 하나, 루터는 로마 가톨릭에서 떠날 준비를 하지 않고 개혁자의 길에 나섬으로써 그를 따르는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목자 없는 양떼요 오합지졸 세력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부분은 16세기 개혁자들의 전략전술상의 허점이 되어 사단에게 빈틈을 주었으며 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보완해야 할 기독교의 고질적인 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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