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승진
(사)한국기독교출판협회
사무국장

시절이 몹시 어수선하다. 혹자는 해방직후 한국 사회를 연상하며 반으로 나뉜 듯한 오늘의 현실을 개탄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우리 민족의 역사 가운데 수없이 반복된 고질적 병(病)이라며 아예 포기한 듯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국가 최고 권력자가 탄핵심판대에 섰으니 그 근거가 된 피의(被疑)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파장이 대단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우리의 민낯은 더 큰 슬픔과 아픔을 예고하는 듯하다.

참가 연인원 1,000만을 넘었다는 ‘촛불집회’와 서울 시민의 50%에 달하는 500만이 한 번에 모였다고 주장하는 ‘태극기집회’가 매주 광화문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다. 한쪽은 현 정부의 각종 정책실패를 질타하고 ‘최순실 국정 농단’을 규탄하며 대통령의 탄핵 및 처벌을 주장한다. 다른 한쪽은 모든 사건들과 대통령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언론과 검찰의 편향성을 지적하며 탄핵을 반대한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이기에 외견상 이러한 소란이나 찬반양론은 당연한 과정이다. 그런데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주장해야 할 공적 광장에서 거짓선동이 춤을 추기 시작하고 이로부터 평화롭게 진행되어야 할 집회가 혐오와 증오에 기댄 폭력성을 내보이기 시작하니 문제다. 특히 그 과정에서 등장한 십자가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잃고, 중세유럽의 십자군처럼 맹목적인 당위적 폭력의 상징처럼 변질된 듯하여 안타깝기만 하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각종 문제에 무관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지상명령(마28:18~20)을 좇아 사회 곳곳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형제이자 제자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그의 군사로서 불의와 죄를 대적하여 승리해야 한다. 하지만, 광화문에서 만나는 십자가가 과연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며, 개인적으로는 의구심을 넘어 일종의 모욕감마저 느끼곤 한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폭력’을 ‘죄에 대한 무기’로 삼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복음을 전하고, 고통 받는 약자들과 삶을 나누고, 불의하고 부덕한 권력에 맞서다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다. 그래서 십자가는 절대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상징이어서는 안 된다.

불의를 배격하고 공의를 세우며 억압과 독재를 척결하고 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를 바란다면, 그래서 십자가를 들고 나선 것이라면 우리의 무기는 ‘애통하는 기도’가 유일한 것이어야 한다. 베드로처럼 ‘칼로 섰다가 칼로 망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모든 이들을 죄에 빠뜨리는 죄의 범람에 대해 애통하며 기도하는 자’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야고보서 4장을 보면 싸움의 시작은 정욕이며(1절),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방법은 ‘애통하는 것’(9~10절)임을 알 수 있다.

광화문에는 두 개의 진영이 있고, 그곳에 각각 생각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다. 외치는 구호가 다르고 그에 따라 주장하는 방법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가장 기본 전제에서 출발한다면,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서로 달라도 같은 주장을 할 수밖에는 없지 않을까? 같은 모습으로 주변을 향해 외치게 되지 않을까? 증오와 혐오로 폭력을 조장하거나 상대를 비웃고 조롱하는 죄의 범람을 그치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애국애족의 방법이 아닐까? 그래서 필자는 그리스도인의 애국애족은 애통하는 기도에서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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