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충성하던 전갑수 사장(국수집), 가나안 성도로 자리하게 된 아픔

 말씀과 동떨어진 교회, 성도들의 삶에 실망… 
“하나님의 인도” 간구하는 삶으로

일한 후 주인 앞에 겸손히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이고 싶다

 

▲ 전갑수 씨가 손 칼국수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반죽을 힘차게 밀고 있다.

“나의 젊은 날에 대해 분명히 실패라고 써주십시오.”

인터뷰 요청에 극구 마다하며 “국수나 한 그릇 잡수러 오이소” 하던 서울 건국대학교 인근의 노룬산시장 ‘국수집’ 주인장 전갑수 씨(66)는 기자를 만난 후에도 신신당부했다. 10여년쯤 전 잘나가던 포목점을 접으면서 그 여파로 가족들에게 경제적 짐을 지운 자신은 인생도 실패요, “하나님의 인도” 따라가기를 갈망했지만 가나안 성도로 살아가는 지금 신앙도 내보일 것이 없다고 했다. 그것을 그대로 써준다면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처음이었다. 자신의 삶을 실패로 갈음하는 사람을 만난 것은. 당황하는 기자에게 그는 “제대로 믿고 싶다”는 일념으로 달려왔지만 지금까지 좌충우돌을 반복하고 있다면서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믿음에 눈뜨고 살고픈, 하나님 앞에 극히 무익한 종일뿐”이라고 했다. 약속을 받고서야 전 씨는 자신이 살아온 ‘실패의 여정’을 다문다문 이어갔다. 진한 멸치육수 냄새와 함께 전 씨의 이야기는 그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 안티에서 충성 성도로…

신앙인이었던 어머니는 믿지 않는 가정에 시집 와서 집안의 반대를 무릎서고 교회를 다녔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간 교회 주일학교 활동은 무척 즐거웠다. 동네에서 제법 영리하다는 소리를 듣고 지냈던 터라 성경암송도 성경퀴즈도 척척이었기에 교회에서도 ‘모범생’으로 통했다. 목사님과 전도사님 등 어른들의 칭찬과 기대어린 시선은 지금도 사무치게 그립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이 하루아침에 경제적인 문제로 풍비박산 나고 가족들이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어머니는 “돈 벌러 간다”는 말만 남기고 집을 나갔다. 집을 팔고 먼 지역의 단칸방으로 이사하면서 교회도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교회는 가족을 버린 어머니의 존재와 함께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걸까.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던 교회에서 한 번도 그 가정을 돌아봐주지 않은 것도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 그 후로 교인들의 전도를 받을 때면 “당신이나 똑바로 잘 믿으라”며 면박을 주었다.

그가 다시 교회에 발을 들인 건 30대 초반, 할머니의 죽음 때문이었다. 결혼해 할머니와 아버지, 형제들까지 12명의 생계를 혼자 어깨에 짊어져야 했던 그는 일찌감치 서울 동대문시장의 포목점에 취직해 성실하게 일하며 일을 배워나갔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며 30대 초반에 안양의 아파트를 장만해 입주, 이웃집의 전도로 아내가 먼저 교회에 다니게 됐다.

할머니가 노환으로 몸져눕자 교회 목사님은 자주 방문해 할머니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병중에 목사님과 함께 예배드리며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신 할머니는 전 씨가 다시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하셨다. 아픈 몸으로 손자인 전 씨의 바지자락을 붙들고 “갑수야, 네가 교회에 나가야 하는데…”하며 애원하는 할머니, 그는 그때마다 할머니를 꽉 밟아버리고 싶을 만큼 교회에 대한 막연한 증오가 있었다.

그렇게 완고하던 그가 녹아진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교회가 발 벗고 나서 장례를 치러준 것이 계기가 됐다. 장례기간 동안 교인들이 돌아가며 음식을 맡아주고 장지까지 동행하며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함께해 주었다.

“그때만 해도 교회가 사람냄새 나는 곳이었죠. 너무 고마워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어린 시절 교회에 대한 아픔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돌아보면 고집불통인 자신을 다시 당신의 품으로 이끄신 하나님의 인도였음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다시 찾은 교회는 동년배의 젊은 성도들이 많아 역동적이었다. 과거 유별나게 기독교인들에게 면박 주었듯이 “예수 제대로 믿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공 예배는 물론이고 주중에도 기도회와 성경공부 등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열심을 냈다.

# 왜 나는 가나안 성도가 되었나?

그렇게 열심이던 전 씨는 왜 가나안 성도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 제대로 믿어보자”는 일념으로 살다가 가나안 성도가 되었노라고 했다. 그에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삶’을 가르쳐준 ‘제자훈련’은 그의 삶을 뒤흔들었다.

“물질적인 성공을 하나님이 주신 복과 동일시하던 풍토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말하는 제자훈련은 신선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르침과 교회의 모습, 성도들의 삶은 판이하게 다른 것이 보였다. 30대 당시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이었던 동대문시장에서 포목점을 차린 그에게 하나님은 “오늘은 어떤 옷감이 잘 나갈까”를 알려주는 ‘점쟁이’ 같은 존재였다. 그런 잘못된 인식에는 교회도 일조했다.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생활 잘 하면 물질 축복이 따라온다는 가르침에 성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하며 열심으로 따랐다. 전 씨도 마찬가지였다.

교회가 건축 빚에 허덕일 때 알뜰살뜰 모았던 전부를 건축헌금으로 목사님께 직접 드렸다. 큰 금액에 목사님도 놀라 선뜻 받지 못하고 기도해보겠다는 게 아닌가. 전 씨도 “나도 기도라는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기도원에 올라갔다.

“믿음이 뭔지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신약성경을 읽기 시작했어요. 3일쯤 되어 눅 17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에 대해 가르치시는 대목에서 충격을 받았어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하고 간구하는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다. “어? 믿음이란 대단한 것인구나.” 성경을 더 읽어 내려가는데 이번에는 엉뚱하게 주인과 종의 비유를 내놓으셨다.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종에게 또다시 주인의 먹을 것을 준비하도록 시키는 모습. 이어지는 말씀은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라 할지니라’(9~10)였다.

마음속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교회의 어려움을 도운 것에 대한 사례는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왜 내가 무익한 종인가?” 거듭 말씀을 읽었지만 왜 믿음의 문제를 놓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 씨는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그 말씀이 분명히 깨달아졌고 지금도 그 말씀을 몸으로 체득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 말씀에 반발이 일어난 건,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내 안 깊은 곳에 자기 의, 하나님으로부터 사례 받고 싶은 마음이 들켰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에 잘못된 부분들을 하나씩 바로잡아갈 것을 제안했지만 교회는 오히려 그를 버거워했다. 결국 아내와 함께 조용히 교회를 나왔다. 그리고 동갑내기 목사와 “성경대로의 교회”를 세운다는 뜻이 맞아 함께 교회를 개척했다. 기성교회의 구태의연한 부분들을 벗고 새로운 시도들을 했지만 성도들이 늘어나면서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고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에 그 교회에서도 3년 만에 나왔다.

그 후로는 교회를 정하지 않고 ‘순례’를 다니고 있다. 교회에서 풀어주지 못하는 물음들을 안고 살면서 그는 50이 넘은 나이에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삶을 강조하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기독입문학을 공부하기도 하고 그 외에도 여러 기관에서 말씀을 공부하며 어느정도 해소도기도 했다. 

가끔씩 알고 지내던 기독교인들 중에 가나안 성도의 삶에 대해 물어오기도 한다. 그럼 전 씨는 “나와도 별 볼 일 없다”며 교회 공동체 속에서 신앙을 가다듬고 키워갈 것을 당부한다. 혼자서는 힘들다는 걸 절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라는 확신 때문이다.

# 칼국수 교회를 꿈꾸다

칼국수 가게를 연지는 3년째 됐다. 칼국수 얘기가 나오자 전 씨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동대문의 포목상을 접은 후 용기 내어 시작한 칼국수 가게가 ‘사역지’로 세워져가길 소망하고 있다.

“주일학교 교사로 가르쳤던 아이가 결혼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는데 밤늦게 울면서 전화가 왔어요. 내일 암 수술을 받는데 당장 눈앞이 캄캄하니 기도해 달라는 거였어요.”

자신도 어려운 처지였지만 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생각한 게 칼국수 집이었다. 칼국수는 주재료인 밀가루가 저렴하고 반찬도 간단해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었다. 칼국수 가게를 통해 수익을 내어 그것으로 우리처럼 자본의 논리에 밀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자는 계획이었다. 그가 먼저 가게를 내고 크게 성공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전 씨가 환갑을 넘긴 나이에 개점했다.

전 씨는 자신 역시 아직 어려운 처지를 면하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성경의 ‘희년’ 정신을 실현하고 싶어 했다. 삶의 힘겨운 상황에 놓인 이들 누구라도 칼국수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싶다면 오란다. 기술을 배워 같이 새 삶을 열어가자고, 혼자는 어렵지만 둘이라면 힘 보태 일어 설 수 있다고. 또 일요일에는 식당 문을 열지 않으니 예배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미자립교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칼국수 가게 주인장이 베푸는 식탁과 함께.

과거 ‘무익한 종’이라는 말씀에 반발했지만 이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한다. 명령하시는 주인의 손끝을 바라보는 종의 신분, 주인이 내게 일거리 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이다. 그리고 더 큰 복은 “일하고 나서도 주인 앞에 겸손히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렇게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을 믿는 믿음의 걸음을 오늘도 걷고 싶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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