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두툼한 서양 고전 관련서적을 번역하게 되면서 서양 고전 수십 권을 읽는 호사를 누렸는데, 그 중 하나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다. 여러 사람이 동시다발적으로 추천하거나 중요하게 거론하는 것을 듣기도 했던 터라 책을 집을 때는 밀린 숙제하는 기분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몰입이 되었고 막판에는 책장 넘기는 것이 아쉬웠다.

내용은 제목 그대로다.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는 이야기. 하지만 <죄와 벌>이라는 그 간결한 제목에는 방대하고 깊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단단하게 압축되어 있다. 보통 사람들이 저질렀다면 벌을 받고 손가락질을 당할 죄로 여겨질 일도 거창한 목적을 내세우며 판을 화끈하게 키워서 저지르면 오히려 영웅 대접을 받지 않는가. 그렇다면 결국 일반적인 선악의 기준에 매이는 대부분의 사람과 그것을 뛰어넘는 극소수의 사람이 있는 것 아닐까.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애칭 로쟈)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고 자신의 입장을 논문으로 써내기도 했다.

주인공이 이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냉혈한에 그쳤다면 이 책은 그저 그런 사이코패스 이야기로 끝났을 것이다. 나도 아마 중간에 책을 덮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쟈는 그와는 다른 흥미롭고 입체적인 이중성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본인은 그럴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논리를 펴지만, 그의 몸과 정신과 마음은 그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리고 로쟈의 철학이 일관성 있게 미시적으로 구현된 인물,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있다. 자신의 모습을 얼마든지 위장하고 그럴듯하게 보이게 만들 수 있으며, 일반적인 선악의 기준에 개의치 않고 자기 뜻에 방해되는 사람은 손쉽게 제거하고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사람. 그런 그는 로쟈를 보고 자기와 ‘같은 과’라는 것을 첫눈에 알아본다. 하지만 둘은 같은 길로 가지 않는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사람의 조합은 이 책의 큰 매력이다. 두 사람이 대면하는 대목은 늘 연인들의 만남 이상의 짜릿함을 준다.

그런데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그 사람들 본인보다는 그들의 ‘곁’에 있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는 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에게 모든 타인은 자신의 매력을 발휘해 써먹을 도구에 불과했다. 그래서 결국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고, 결국 그것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했다.

그러나 로쟈의 곁에는 친구와 동생과 연인 소냐가 있다. 로쟈는 철저히 혼자이고 싶어 하면서도 또 언제나 주위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내미는 손을 뿌리치다가도 다시 손을 내민다. 그리고 그에게 너무나 소중한 그들이 모두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에게 죄에 대한 벌을 받으라고,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라고 말해준다. 오히려 악당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에게 빠져나갈 길을 주겠다고, 살 길을 열어주겠다고 ‘유혹’하지만, 진정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죄값을 받으라고,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으라고 촉구하고 그 과정에 함께 하겠다고 말한다. 자기 죄를 부인하고 책임을 회피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 로쟈가 비로소 온전하고 건강한 한 사람으로 설 수 있고, 그것이 로쟈를 위해서도 이후 로쟈와 그들의 관계에도 힘들지만 가장 유익한 길이라 믿었던 것이리라.

그런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로쟈가 자수하러 가는 장면이다. 로쟈는 자수를 결심하고 경찰서로 들어갔지만 경찰들과 대화가 잘 풀리지 않고 해서 어찌어찌 경찰서 밖으로 다시 나온다. 그런데 그때,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냐가 두 손을 마주잡고 간청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본다. 여기서 로쟈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들어가서 자신이 범인임을 자백하게 되는데, 나는 이 대목이 너무나 가슴깊이 다가왔다. 사람은 얼마나 약하고 흔들리는 존재인가, 그리고 참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장면이다.

최근 어떤 분이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대다수 국민들도 진실이 낱낱이 밝혀지기를 바라는 점에서는 생각이 같을 것이다. 그런데 <죄와 벌>의 두 주요인물을 생각하면서 나는 자꾸만 그분의 ‘곁’을 주목하게 된다. 나는 누구에게 곁을 주었는가. 내 곁에는 누가 남아있는가?  

홍종락 /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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