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신 마비 장애 딛고 성악가로서 봉사의 삶 살아가는 황영택 집사

크레인 사고로 하반신 마비, 37살에 성악 도전
“하나님께 최고의 찬양 드리고파”

장애를 불행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설 수 있도록 장애인과 비 장애인
함께 걷는 훈련 필요

 

   
▲ 황영택 집사

“휠체어 성악가 황영택이 아니라 테너 황영택으로 불러 주세요.”
사고로 하반신 불수 장애인이 되어 살면서 휠체어 테니스 국가대표로 세계무대에서 뛰었고, 지금은 성악가로서 위로와 희망의 메신저로 살아가고 있는 황영택 집사(50, 부천교회)는 자신에게 붙은 ‘휠체어’ 꼬리표를 떼고 성악가로 불리기 원했다.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는 강의와 수많은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 출연으로 ‘휠체어 성악가’라는 별칭이 붙었지만 장애와 비장애를 넘어 당당하게 실력으로 겨뤄왔다. 최고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배우며 노력하는 자신을 ‘장애인’이라는 편견에 가두지 말 것을 당부했다. 아니,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장애’라는 단어가 없어져야 한다는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로 흔히 갖는 장애에 대한 편견의 장벽을 깨부쉈다. 그건 그가 걸어온 진한 삶이 응축된 말이기도 했다.

# 장애, 인생의 본질을 깨달은 통로

나에게 장애란 무엇인가?
황 집사는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사람답게 살게 해 준 씨앗”이라고 했다. 지금이야 25년간 휠체어에 앉아 살아온 삶을 감격의 시선으로 돌아볼 수 있지만 사고 당시 이제 막 가정을 꾸린 젊은 청년에게 하반신 불수 판정은 죽음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황 집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젊은 나이에 미래에 대한 부푼 기대로 당시 붐이던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사고가 난 건 1992년 10월 21일, 가랑비가 내려 공사 현장 바닥이 질퍽질퍽했다. 크레인 작업을 강행하는데 길이 15m, 둘레 7m, 무게 1톤의 콘크리트 파일을 땅에 세우기 위해 크레인으로 당기는 중 그만 70도 각도에서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파일이 운전석을 덮쳤다. 손쓸 틈도 없이 날아오는 거대한 파일에 맞는 순간 배꼽 아래 부분이 작두로 잘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곧바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10일 만에 깨어났다. 살았다는 기쁨도 잠시, 허리 밑으로 감각이 없었다. 재활치료를 받으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기대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황영택 씨는 척수 11번, 12번 손상으로 배꼽 이하 하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의사의 말은 거대한 파일이 자기를 덮칠 때보다 더 공포스러웠다. 황 집사의 나이 25세, 아내는 23세였다.

“술로 나의 정신을 마비시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죽음이 끝이라면 딱 죽으면 좋겠다 싶어 자살시도도 여러 번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어요.”

다리를 쓰지 못하니 병원 베란다 난간을 넘는 것도, 달리는 자동차에 뛰어드는 것도 불가능했다.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어 방황은 깊어갔다. 가장 무서운 건 “저기 다리병신 지나간다”며 손가락질하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에게까지 놀림 받는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보며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희망, 바로 아내의 임신 소식이었다.

“입원한 지 4주쯤 됐는데 아내가 병간호하면서 힘들어했어요. 진찰 받아보니 임신 5주였어요. 하나님은 그렇게 나에게 삶의 끈을 붙들게 하셨어요.”

하지만 아들이 태어나고 ‘앞으로 어떻게 산단 말인가’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방황하며 술에 취해 자다 깼는데 돌을 막 지난 아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당신이 내 아버지 아니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린 아들을 돌보랴 남편 병수발 하랴 피곤에 지쳐 잠든 아내도 ‘당신이 내 남편 아니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내가 남편이고 아버지구나’를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좌절하며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 불가능에 도전하다

모태신앙인 아내를 따라 교회에 끌려 나갔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를 다치게 했는가 하는 생각에 분노했다. 그러다 교회에 나가 예배하면서 ‘나를 고쳐주시면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겠다’고 조건을 붙였다.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해 성경통독을 거듭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에게 영생의 삶을 깨닫게 하셨다.
“내 인생은 천지창조 때부터 계획되었고 하나님이 육신의 호흡을 거두신 후에는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깨달음은 장애인인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었어요. 영원한 삶이 있다면 하반신 마비로 40, 50년 살아도 얼마든지 살 가치가 있다는 용기가 생겼어요. 사랑의 삶, 나눔의 삶, 베풂의 삶을 배워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인간을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깨달았어요.”

삶의 의지가 생긴 후 재활을 목적으로 만난 게 휠체어 테니스였다. 뭐든지 시작하면 열심히 하는 성격이라 일본 유학까지 하며 실력을 다져갔고 5년 만에 국가대표가 됐다.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했고 세계 랭킹 36위에 오르는 등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중 계단을 내려가다가 휠체어 바퀴가 걸려 넘어지면서 오른손 중지를 다쳤다. 테니스를 치려면 빠르게 휠체어를 움직여야 하는데 더 이상 속도를 낼 수 없게 됐다. 또 한 번의 좌절이었다.

또다시 시작된 고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기도원에 들어가 금식기도에 돌입했다.
“3일째 금식하는데 배고파 죽겠더라고요.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어요. ‘그동안 먹고 싶은 음식 다 먹고 뭐하고 살았느냐?’고 책망하셨어요. 아, 그동안 나를 위해 하나님을 도구 삼았구나하는 깨달음이 왔어요.”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장애 입은 후 교회에서 예배하며 찬양 속에 회복되었던 것이 떠올랐고 찬양을 통해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휠체어 테니스 선수로 뛰면서 틈틈이 휠체어 중창단으로 활동했었다. 그의 나이 37세에성악가의 길에 도전했다. 수능을 보기 위해 공부하고 성악 레슨을 받으며 노력한 끝에 실기 1등으로 음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서도 문제였다. 성악은 온몸을 악기로 사용하는 것인데 하반신 마비이다 보니 복식호흡과 다릿심을 이용할 수 없어 소리에 힘을 싣는 것이 불가능했다. 휠체어 테니스를 통해 터득한 투지와 끈기로 훈련을 거듭하며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허리에 감각이 없으니까 처음에는 배에 벨트를 두 개씩 차고 압력을 느끼기 위해 집중했어요. 점차 복식호흡을 터득했고 횡경막에 근력이 붙으면서 소리에 변화가 생기더라고요.”
아침 7시에 학교에 가서 밤 11시까지 공부했다. 새벽이면 ‘하나님께 레슨 받는다’는 심정으로 새벽제단을 쌓으며 지혜를 구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으니 소리 내는 것도 하나님께 배우는 게 최고의 선택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2007년 학교를 졸업, ‘노래하는 장애인이 아니라 성악가 황영택’이 되었다.

황 집사는 학교 졸업 후 성악가의 길을 걸으며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는 인기 강사로 활동하고 봉사의 삶도 열심히 살고 있다. 장애인 인식 개선을 위한 장애인 아티스트들의 희망콘서트, 병원 공연을 꾸준히 해왔으며,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 합창단을 창단했다. 노래가 주는 즐거움은 모든 아픔을 잊게 한다는 것을 더욱 깨달아가고 있다.

황 집사는 “장애가 장애 아닌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세상이 되려면 장애인도 비 장애인도 장애를 불행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함께 걷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좋은 소리는 인위적인 힘을 뺄 때 가능하다는 황영택 집사,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좋은 연장이 되고 싶다”며 오늘도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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