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천년여행 [ 213 ] / 사제 왕 요한 ⑪

▲ 중세 서구인들의 환상을 한껏 부풀려놓았던 사제 왕 요한의 ‘친서’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 소장)

케레이트 왕국 사제단 일행이 야율 대석과 만나는 시간이다. 굳이 일개 사제들을 접견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을지고가 난색을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야율 카간은 사제단을 맞아들였다.

“아이고, 사제님들 먼 길 오시느라 고생들 하셨습니다. 이렇게 작은 나라까지 살펴주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소이다.”

“카간이시여. 천사들이 누릴 영광의 사제시여, 저희 작은 종들이 문후를 여쭙나이다.”
“이 무슨? 무슨 인사가 이러시오?”

야율 카간과 케레이트 사제단 사이에 배석한 을지고가 소리 없이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야율이 의문을 가지고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마냥 웃고만 있을 수 없었다.

“폐하, 사제단이 제게 하는 말씀들인데 케레이트국에서는 야율 카간은 하나님이 숨겨두신 동방의 사제 왕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답니다.”

을지고의 말을 들은 야율 대석은 더욱 난감해졌다. 케레이트가 혹시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야율의 신생국을 케레이트의 일부로 흡수해버리려 했다는 음모에 대해서도 순간 그의 머리를 스치는 느낌이었다.

“폐하,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을지고가 긴장했다. 야율 대석의 표정이 의외로 심각해 보였다. 그래서 그렇게 보이는지 몰라도 얼굴이 창백해지고 그의 눈빛은 적을 노려보는 독수리의 그것과 같았다.

“아, 아, 아니오. 내가 잠시 생각에 잡혀 있었소. 나는 어릴 적부터 집안 어른들이 너는 사제 노릇을 하면 좋겠다 하셨는데 갑자기 사제단이 전하는 덕담이 내 속마음을 놀라게 했나봅니다.”

“황공하옵니다. 카간이시여! 저희 나라에서는 카간이야말로 우리들 초원의 나라가 유럽 진출의 길을 여는 전위군을 지휘하시면서도 유럽이 기독교 나라이니만큼 사제의 품위와 덕망, 그리고 군 지휘력이 있는 사령관이시고 평소에는 백성들을 널리 평안케 하는 군주의 위엄까지 갖춘 보기 드문 지도자라고 칭송이 자자합니다.”

“자, 과분하오. 사제님들이 사람을 계속 놀리시면 안 됩니다. 어서들 차 드시면서 말씀을 이어갑시다.”

“아닙니다. 지금 십자군과 이슬람의 사라센 간에 전쟁 중이잖습니까. 지금 에뎃사에서 안디옥까지 전선이 형성되었고, 사실은 저희가 금번 메르브 출장길마저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마, 카간께서도 보고받으셨을 터이지만 십자군 진영에서는 곧 아시아에서 십자군 지원을 위한 기독교 군대가 투입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소문은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우리 케레이트국에도 십자군 정보 담당들이 와있습니다. 나이만이나 옹구트국은 물론 금나라에까지도 아시아의 십자군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고 있답니다. 그래서 저희는 카간의 카라 키타이(흑 거란)국이 십자군을 지원할 수 있다고 봅니다.”

“허어, 그런가요. 그렇지 않아도 을지고 장군의 보고를 며칠 전에 받은 바는 있지요. 그런데 십자군 정보처에서는 우리 카라 키타이 군을 네스토리우스 이단의 자식들이라고 싫다는 군요. 관두구려, 이슬람에게 실컷 당하고 나서도 이단이니까 싫은가를 두고 봅시다.”

“폐하, 그건 철부지들의 판단이고 지금쯤 십자군 상급자가 우리나라를 향해 출발했을 것이랍니다.”
을지고가 나섰다.

“좋소, 그건 나중 일이고 주교님들은 메르브 본부에 가시는 길이라면서요? 먼 길 가시는데 푹 쉬셨다가 떠나시죠. 성의껏 대접해드릴 겁니다.”

“위대하신 카간이시여, 저희 마르구즈(마가) 칸께서는 야율 카간을 한 번 뵙고자 하나이다. 카간께서 울란바토르에 오셔도 좋고 저희 칸이 직접 이곳 발라사군으로 오셔서 야율 카간과 회동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내용을 작고 작은 종인 저 수르마 주교에게 당부하시면서 정중하게 이를 카간에게 직접 말씀드리라 하셨나이다.”

“수르마 주교님, 그 말씀을 저에게는 하시지 않으셨잖아요?”
을지고가 섭섭하다는 투로 수르마에게 말했다. 하지만 을지고는 미소를 입에 가득 물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대장군 을지고 님을 소홀히 하자는 뜻 전혀 없습니다. 다만 저희 칸께서 야율 카간 앞에서 직접 마치 친서를 올리듯이 정중히 전하라 하셨기에 우둔한 제가 그만….”

“됐소, 됐어요. 고마울 따름입니다. 한 번 좋은 방법을 생각해보겠소이다.”
야율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가 메르브 여행을 마치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저희 케레이트국은 자타가 인정하는 초원국가 20개 중에서 전체 인구가 모두 기독교인들입니다. 전체가 세례 받아야 하고, 기독교의 법도를 따릅니다. 장차 저희는 뜻이 통하는 나라들과 연합하는 제국으로까지 발전해 유럽 기독교를 압도하는 동방의 기독교 제국을 이루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지요.”
이 말은 수석 사제인 디모데 목사가 끼어들며 했다.

을지고가 야율 황제의 표정을 빠르게 살폈다.
“거, 아주 좋은 생각이오. 나 또한 적극 찬성입니다. 광활한 자연조건을 허락하신 하늘 하나님께서 유럽의 기독교처럼 동방 제국을 이루어 바치면 이보다 더 좋은 충성이 어디 있겠소이까. 말만 들어도 짐은 기쁘오. 우리도 케레이트처럼 전 인구가 기독교인으로 을지고 장군이 힘을 쓰고 있답니다. 안 그렇소? 을지 장군!”

야율 대석은 케레이트 사제단을 형제처럼 대하고 그들의 편의를 세심하게 봐주도록 을지고에게 명령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카라 키타이 야율 대석의 나라는 인구가 늘어나고 주변국으로부터 칭송 또한 자자했다.

그런데, 십자군을 총지휘하는 로마 가톨릭 교황은 물론 동로마(비잔틴) 황자는 지원군으로 온다는 군대가 오지 않아서 낭패를 보고 있었다. 현지에서 이슬람군의 위세에 눌려 더는 예루살렘을 방어할 수 없는 십자군 또한 교황이나 황제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십자군 진영에서는 탈영병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방어선이 와해되어갔으며, 장수들은 이를 수습하느라고 진땀을 흘렸다.

십자군 진용에는 동방아시아, 곧 네스토리안 교단의 특성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들은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아시아 대륙에 기독교가 어떻게 또는 얼마나 많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지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정보로는 인도에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가 활동했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네스토리우스 파 집단을 염병처럼 더럽고 징그럽게 생각해오던 중세기 로마 교회 사람들은 네스토리우스가 싫고, 또 1천여 년 가까이 사단의 세력으로 치부해오고 있었으니 그들 네스토리우스 파 기독교 군대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부터가 싫었다. 마음속으로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하는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그들 십자군은 아침저녁으로 동녘, 저 멀리를 바라보면서 사제 왕 요한이 이끄는 십자군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어느 날, 2차 십자군 전쟁마저 참담한 패배로 끝난 시간에 사제 왕 요한이 비잔틴의 동로마 황제 마누엘 콤네누스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 역사의 자료가 사제 왕 요한의 친서라는 이름으로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원본은 아니다. 다만 수없이 많은 사본들이 전해지고 있다. 원래 내용을 알아내기 어려운 형편이다. 각지에 흩어진 사본이 80여 종이 있는데, 이를 분석한 학자들은 위조와 삽입의 흔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러 형태의 위조부분이나, 또 학자들의 연구 자료를 여기에 옮길 수는 없다. 그러나 위조문서라고 해서 진실부분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문서 내용에는 이단 취급을 받고 있으나 이에 동의하지 못하는 동방아시아의 네스토리우스 파 신자들의 안타까운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런가하면 유럽 교회와 비잔틴 교회 간의 자기 식 표현으로 사제 왕 요한의 친서 속에서 서로 싸움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보다 더 중요한 내용은 십자군과 이슬람의 싸움을 걱정하고 그들의 왜소한 신앙을 비웃는 듯한 내용도 있다. 역사 속에서 흐르는 민심이요 하나님의 경고도 있어 보인다. 동방아시아 교회사에 큰 자취를 남긴 카라 키타이 야율 대석 카간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야율 카간은 임종의 시간을 준비해야 했다. 이미 조정대신들에게는 유언을 다 남겼다. 나머지는 왕비와 자녀들, 그리고 그의 평생 친구인 을지고가 가족의 이름으로 그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을지고 장군! 나라를 당신에게 물려주어야 하는데 그리 못해서 미안하오.”
야율 대석은 천천히 말했다.
“폐하, 소인은 폐하보다 먼저 떠나도록 되어 있으나 폐하를 전송하고 뒤를 따름이 예의인 줄 아시고 예수님이 지금 폐하 곁에 저를 남겨주신 겁니다.”
“그래, 그게 그런가….”

야율 대석의 아내 소탑은 남편의 발밑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당신이 울면 내가 떠날 수 없어. 나는 이 북방 하늘의 별이 되어 당신을 지켜줄 거야.”야율 대석은 또렷한 말로 아내인 소탑을 위로했다. 야율 대석은 왕비 소탑이 아들 야율 아열의 성년기까지 섭정을 해줄 것으로 믿었다.

작가 조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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