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병인 소장
고병인가족상담연구소

해로운 수치심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그들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며 스스로를 가치 없게 여긴다. 해로운 수치심은 영혼의 질병과 같으며 자신을 부인하도록 만든다. 해로움 수치심을 느끼려면 수치심 이전에 이미 다른 수치심이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죄책감과 상처와 두려움을 가지려면, 그 이전에 해로운 수침을 먼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인간의 감정은 어떤 감정이든지 내면화될 수 있다. 내면화란 여러 감정 중 특정한 상황에서 감정의 기능이 멈추어서 아예 성격 자체로 굳어졌다는 뜻이다 우리들 주변에도 ‘투덜대는 사람’, ‘인상 쓰는 사람’, ‘슬픔에 젖어 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그들은 어떤 특정한 감정이 이젠 그 사람의 정체성 즉 성격의 핵심이 된 것을 보여준다.

수치심이 내면화되는 과정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면, 첫째, 수치심이 내재된 사람에게 양육 받아 수치심을 학습하며 나중에는 그 사람과 마찬가지가 된 경우, 둘째, 어릴 적에 버림받고 학대받은 충격으로 인해 감정과 욕구, 동기가 수치심에 묶인 경우, 셋째, 수치심이 드는 기억들이 내면화되어 속에서 계속 악순환으로 작용하는 경우이다. 감정이 내면화되려면 오랜 시간과 과정이 소요된다. 그리고 위의 세 가지가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강화될수록 수치심은 더욱 내면에 단단히 자리 잡히게 된다.   

아이가 버림을 당했을 때 수치심은 내면화하게 된다. 다시 말해 유기란 그 일을 당한 사람의 자아와 정신적 힘이 말살되는 결과를 낳는다. 아이들은 그들을 돌봐주고 그들에게 반영해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살 수 없다. ‘버림받음’이란 반영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수치심이 내재화되어 감정이 닫힌 부모는 아이의 감정에 반영해줄 능력을 잃고 만다. 아이가 태어난 후 감정을 반영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경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감정의 교류는 정말 중요한 것이다.

에릭슨은 인간의 자아를 상호적인 교류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아동기와 사회>에서 “내면의 일치감과 지속성을 비롯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자아의 정체감은 자기를 돌봐주는 사람의 행동의 동일성과 일관성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유기, 다시 말해 버려짐은 아이의 의존하려는 욕구가 무시되고, 모든 종류의 학대, 산만한 가족관계나 가족체계(system)의 필요에 의한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 기본적인 욕구나 느낌이 수치심에 묶였다는 것은 이미 건강한 수치심이 해로운 수치심으로 변형되어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뜻과 같다. 

이것은 무엇을 원할 때마다 자신의 욕구를 수치스러워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동기와 느낌은 인간 삶에서 핵과 같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치스럽다는 말은 자신의 존재 중심에서부터 수치를 느낀다는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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