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21세기 이렇게 대비한다 <40-13>

16세기 기독교 개혁을 “종교개혁”으로 표기했던 이유는 1517년 이후의 세계사는 유럽 골짜기의 기독교가 세계사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신(神)적인 요구에 따른 계시에 가까운 하나의 암시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으로 역사의 무대에 뛰어든 예수의 시대는 지배자와 노예의 이분법적인 종교지상의 시대를 폐기하고, 종교가 아닌 시대 또는 새 종교의 시대 선언이었다.

이를 물려받은 로마, 이어서 게르만의 서유럽이 1천여 년 가꾸다가 16세기에는 세계(인류)사의 구원을 선언했던 것이 바로 16세기 종교개혁이었다. 이토록 중차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부여받은 16세기 개혁자들이 자기 사명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로마 가톨릭을 타도하고 새로운 지배자가 되려는 욕망에 취해서 세월을 허송하다가 계몽기의 철학적 반란과 이어지는 공산당 선언까지 불러냈고, 끝내는 히틀러 앞에 굴종하는 시대로까지 전락하는 기독교 신세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세계에 기독교의 기반을 튼튼히 세워가는 기독교의 양대 기둥이었다. 당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이 적이 아니라 오히려 아라비아의 이슬람이 기독교 갈 길에 큰 장애물임을 깨달아야 했었다. 

그러나 16세기 개혁자들 중, 이슬람 경전인 꾸란을 읽었다는 기록을 보지 못했다. 루터의 경우는 자기 입으로 꾸란을 읽어보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16세기 기독교는 꾸란뿐 아니라 이슬람의 실체를 좀 더 겸허한 마음으로 살펴보면서 단계적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이슬람은 그렇게 가볍게 볼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도를 비롯한 인도차이나 지역과 중국대륙을 어떻게 기독교화 해야 하는가를 심층 탐구했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종교개혁 500년 차의 해를 맞이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로마 가톨릭, 러시아, 그리스 정교회는 물론 시리아, 앗수리아, 이집트 콥틱, 에치오피아 정교회들과 선교 또는 친화(친교)의 연대를 가꾸어 나가면서 때가 무르익을 경우 다시 한 번 세계사의 구원자로서의 기독교 역할을 가다듬는 “21세기 형 종교개혁”의 선봉에 서도록 노력해야 한다.

전향적인 인류사 구원의 선봉에 서서 기독교가 인류 구원의 유일한 대안임을 자신하는 포부를 가다듬지 못하고, 여러 종교들 중 하나로 생존하려는 비굴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주 예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는가.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니까 무엇인가 기념비적인 일을 해보고 싶어하기는 하면서도 메시지가 없다. 예년이나 다를 바 없는 반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비해 정치사를 보라. 변화를 추구하는 민심의 흐름을 외면하지 않고 나라를 좀 더 전향적으로 발전시켜보려고 모두들 노력하지 않던가. 한국교회의 금년 포부는 어떤가? 어떤 변화, 어떤 목표를 진실로 원하는가, 한국교회는?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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