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선생이 그래도 기독교의 영원한 스승이요 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마쉬아흐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나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마쉬아흐께서 사는 것입니다”(갈 2:19~20, 허성갑의 <직역성경>)라고 한 고백 때문이다.

마쉬아흐, 우리의 습관대로는 메시아의 원어음이다. 신약성경에는 “주님”으로 표기하고 있는 메시아 예수. 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경험을 한 바울 선생은 다메섹 그날부터 로마 바티칸 그 언덕에서 목이 잘릴 때까지 바울은 그가 기르는 양떼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바울 선생이 로마 네로 황제의 재판을 받고 방면된 후 다시 로마로 압송될 때까지 기간을 약 4년으로 보는데, 그때 바울은 주로 섬들을 찾아다녔다. 마지막 시간이 드로아에서인데, 어떤 사람은 사도행전 해석을 할 때 드로아에서 로마 감시망에 걸려들어 붙잡혔고 그때부터 로마까지 압송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은 바울은 네로의 극한적인 박해를 바라보다가 스스로 판단해 자수했다고도 해석한다. 바울이 숨어 지내던 드로아에서 그의 몸을 드러낸 것은 어린 신자(제자)들이 너무 많이 잡혀 죽으니 이러다가 복음 열매의 씨가 마르겠다, 내가(거물이) 잡히거나 자수하면 박해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어린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수했다고 해석한다. 논설자도 후자를 선택한다.

우선 멋있지 않은가? 사도가 제자들, 어린 것들을 살려보고자 하는 애틋한 정으로 늙은 자기 목숨 충분히 숨어 지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네로에게 바쳤다니 참 아름다운 목자의 마음이 아니겠나.

앞서 갈라디아 2장에서 바울은 내가 마쉬아흐(메시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나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마쉬아흐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라고 고백했다.바로 이 같은 삶의 틀에 붙잡혀 훈련한 사람을 우리는 사도, 복음의 사역자, 또는 목사라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이 같은 자세를 가진 성도들을 장차는 성자요 성녀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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