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을 넘어서서 <1> - 16세기 개혁 회고와 반성으로 새 물꼬를 튼다


16세기,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 예배당 정문에 내걸었던 95개 조항을 내용별로 살펴보아도 그것들은 로마 가톨릭 윤리 경고용이었다. 다시 말하면 마르틴 루터는 그가 요구한 95개 조항 건의문은 가톨릭 내부 조정용으로 만족했지 1천여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중세 기독교가 두 조각나는 불행스런 결과를 상상하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결과 과정을 지켜보면서 돌연변이처럼 나타날 상황변화를 해결할 대안 제시가 턱없이 부족하기도 했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틴 루터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수고를 창의적인 열매로 인정할 부분과 또 한시대 안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단숨에 처리하려는 과욕을 부렸던 부분 더 나아가서 과오로 결과 되어진 부분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하나님의 시대 요구에 의해서 루터를 비롯한 쯔빙글리나 칼빈의 수고에 대해서 감사하고 치하해야 할 부분이 있다.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만이라는 교리적 순수성 회복이다. 물론 이 부분에서 “믿음으로만”이라는 “~만”이 해석상 지적되기는 한다.

믿음으로만이 일방적 강요가 될 경우 이는 미신적 신앙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직전의 중세말 유럽 기독교 환경은 공로신앙(행위신앙), 면벌부 신앙 등이 워낙 강세를 부리던 때였기에 “오직 믿음으로” 또는 “믿음으로만”이라는 로마서 3장의 해석에서 “오직” 그리고 “~만”의 성경번역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으로가 열매(행위)에 비중을 두신 예수의 말씀, “그 나무는 열매로”가 입증될 때 그 존재 이유가 확인된다는 말씀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16세기 초의 상황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4세기 중엽 이태리에서 등장한 “르네상스 운동”은 중세 로마 기독교에 짓눌려 지냈던 고전문화의 부활을 목표하는 시대요구였기에 종교개혁은 중세가치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르네상스 운동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었으나 르네상스의 고대 그리스문화의 부활이 기독교의 본체(본질) 훼손으로까지 접근해온다고 생각해서 16세기 개혁자들은 “이중동작”을 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 증거로 가까이는 가톨릭 신부이기도 했고 유럽의 최고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와 마르틴 루터의 미묘한 갈등은 루터나 에라스무스 모두에게 상처와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자신이 주도하는 인문주의적인 종교개혁 운동에 동참해서 함께 일해 줄 수 있다고 확신했으나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신앙에서 반(反) 기독교적인 르네상스 정신을 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루터는 에라스무스를 포기해버릴 만큼 한가해서는 안 되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 사이에 토마스 뮌쩌 신부가 농민반란운동과 재세례파 운동에 간여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을 간단하게 처리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사실 마르틴 루터는 제네바의 칼빈처럼 정치가, 사상가, 조직행정가, 그리고 조직신학자의 다면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으로 단순혁명가적인 기질을 앞세워서 곳곳에서 사건만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16세기형 기독교 개혁이 결코 일과성 혁명이 아니었음을 뒤늦게라도 발견해야 한다. 오늘의 역사적 시간은 2017년, 곧 21세기의 출발점이다. 1517년을 출발점으로 기록하고 있는 16세기 종교개혁기에서 500년이라는 시공간의 간격을 두고 있는데 16세기와 21세기 사이의 단절에서 오는 고민과 갈등은 내던져버리고 마치 세종대왕님 탄신일을 추모하는 식으로 16세기 종교개혁을 대하는 자세는 스스로 자기 발등을 찍는 행위이고 더 나아가서 자기 심장에 못질하는 위험한 자해행위가 된다.

지금 21세기 기독교는 역사무대에서 자칫 “용도폐기”를 거론해야 할 만큼 위기에 와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더 이상 깨달음의 발견을 포기하거나 예수와 함께 뛰고 달려야 할 십자가 행진을 포기한다면 기독교는 끝이다. 누가 기독교를 없애버리기 때문에 끝장이 아니라 쓸모가 없어지기에 끝이다.

그럼 우리는 16세기 기독교가 미완으로 끝나버리고 입을 싹 씻어버린 몇 가지를 여기서 생각나는 대로 지적해보자.

 

1. 개혁 과정의 문제들

1) 이신득의 곧, 믿음으로 얻는 의에 대해 교리적 빈틈이 있음을 발견했는가?

2)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가 만인제사로 귀의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3) 만인제사에 대해 신학적 보완을 하지 못함으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제사종교(기복종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구약의 예루살렘 제사종교와 결별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음을 알고 있는가?

4) 만인제사 신학과 신앙을 발설한 루터는 독일의 농민반란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루터의 강경 진압론으로 1525년 7월 10만여 명의 농민군이 몰살당했던 비극에 책임은 없는가?

5) 1525년 1월 21일 밤에 등장한 취리히 쯔빙글리의 일곱 제자들이 결행한 재 세례 운동에 대해 당시 종교개혁 그룹은 로마 가톨릭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탄압했고 또 그들이 죽인 자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아는가? 그러나 16세기 개혁자들이 태어나서는 안 될 광신도집단 취급한 당시 재세례파 신자들은 유럽, 미국, 카나다, 아프리카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아미쉬 등의 이름으로 1천만 명 이상의 비폭력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지켜가고 있음을 아는가?

⑥ 1529년 루터와 쯔빙글리가 성례전 문제로 4일 밤낮을 토론하고 기도했던 마르부르크 성 사건을 아는가? 그때 루터는 성찬론에서 가톨릭과 유사한 변체설, 성례전 상의 포도주와 떡이 예수의 피와 살이라는 주장과 쯔빙글리의 상징설이 끝까지 대립하여 4일 밤낮을 신학적 토론과 신앙 중심의 기도로 해결하지 못했고, 그때 쯔빙글리가 내민 “형제여!”라는 악수요구에 “당신이 나의 형제냐?”라며 쯔빙글리의 손등을 쳐버린 루터는 아직도 쯔빙글리의 형제가 되지 못할까? 그럼 우리는 상징설과 루터의 변체설 사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7) 프로테스탄트와 교황권의 로마 가톨릭이 1530년대에 들어서서 본격적인 양자회담을 열었다. 쉽지 않은 것이기는 했으나 가톨릭이 일단 교황제도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루터는 개혁 초부터 교황권을 저주했다. 교황좌는 사단의 자리요 현직 교황은 사단의 하수인이요 사단의 자식이라고 몰아붙였다. 초기에 루터는 교황제도를 부인하고 교회 총회제도로 전환할 것을 가톨릭 측에 요구했다. 가톨릭은 루터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으며 양측은 회담을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으나 루터가 1546년 세상을 떠날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그토록 험악했던 때에 로마 가톨릭과 기독교 개혁파 그룹이 테이블에 마주앉아서 회담을 가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 로마 가톨릭 등과 우리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과 사태해결을 위해서 회담을 계속했다. 그 회담은 역사의 진행형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틴 루터가 세상을 떠나면서 신·구 기독교의 회담(만남)이 중단되고,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 전쟁”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 30년 전쟁이 기독교와 로마 가톨릭의 500년간 단절기간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여담 같은 말이지만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정말로 횡재를 만난 곳은 로마 가톨릭이다. 로마 가톨릭은 16세기 종교개혁 여파로 1550년에 “예수회” 중심의 “외방전교회”를 만들어서 “안에서 잃은 것 밖에 가서 보충하자”는 캐치프레이즈로 세계선교에 나선 후 동남아시아, 인도, 중국, 일본, 아프리카 등지의 선교영역을 앞장서서 넓혀갔다.

더 중요한 것은 가톨릭은 내부적으로 나쁜 습관들을 고치고, 긴장감을 가지고 내부 개혁을 시도했다. 그 결과 1800년, 1825년 무렵에는 윤리적이고 교리적인 상승을 시도했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는 왜 가톨릭과 전향적인 회담 진행을 못했을까? 서두에 말했지만 루터의 95개 조항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루터의 개혁운동은 진행 중간에 어떤 충격을 받았을 것 같다.

아마, 마르틴 루터의 딜레마는 농민반란군 문제와 만인제사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루터가 만인제사론을 들고 나왔을 때 루터 등장 이전부터 시작된 농민반란 세력들에게 기름을 부은 결과를 가져왔었다. 거센 돌풍현상은 루터에게 큰 짐이었다. 사실상 종교개혁의 열매를 따겠다고 덤비는 농노들은 목숨을 걸었다. 가톨릭 영주들은 루터에게 중재를 부탁했고, 루터는 자기 실력으로는 손을 쓸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극한상황에 몰린 루터는 혈서를 써서 보내기도 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1525년 7월 농민군 10만명이 집단 학살된 그 직전 6월에 루터는 그의 아내 폰보라 카타리나와 결혼식 피로연을 했었다. 인지상정 아닐까. 겸사겸사 괴롭겠지. 농민군은 분류하면 모두 루터의 제자들이다. 그들 10만 명이 죽었으니 그들이 부양하는 가족을 5명씩으로 보면 60만 명이 죽거나 노예로 팔려가는 등 비인간적 삶을 살게 되는데 지도자인 마르틴 루터에게 피눈물 나는 고뇌가 없었겠는가?

기록을 보면 만인제사론 때문인 듯, 루터는 교회 목회나 개척에 전념하지 않았다(신·구교 분리 분열 시대이니까 사고 난 교회들 숫자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도 없다. 또 기록을 보면 가톨릭에서 파문된 후에도 상당기간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 예배 인도 시에 사제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고 전한다).

아무튼 신·구 기독교가 진실한 마음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를 놓고 회담을 했다. 부득이 30년 전쟁이라는 갈등이 있었지만 2천년 살림 속에서 30년은 부부싸움 하룻밤 시간 정도일 뿐이다. 500주년을 맞이한 기독교는 “종교개혁”이라는 대표성 호칭을 오늘의 세계가 부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왜 기독교 자체 개혁이 아니고 종교개혁일까? 기독교에게 16세기까지만 해도 인류가 대표 종교 대접을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3. 16세기 과정적 착오는 르네상스에 대한 대처 미흡에서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바로 직전까지, 정확하게는 1250년대부터 1500년 무렵까지 유럽을 강타한 르네상스 여파를 종교개혁자들이 두려워하고 혐오했음을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사상의 부활로써 중세 로마 기독교의 윤리에 짓밟힌 인간주의와 자유주의의 부활이었다.

기독교 문화의 기초 위에서 조화가 아니고 도발이었다. 인문에서 소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읽으면 자유분방, 자유방임이나 에라스무스와 비슷한 시기의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은 사악한 정치사상과 정치 행위의 조장으로 그를 역사는 악의 교사, 악마적 마술사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16세기 순박한 개혁자들이 르네상스의 좌파적 기질 곧 반(反) 기독교적인 의도적 행위를 감당해내지 못했다. 에라스무스 같은 신사적인 인물도 퇴출시키고 말았던 루터의 기질과 소양으로는 선 같기도 하고 악의 화신 같기도 했던 르네상스의 어떤 흐름도 소화해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4. 르네상스의 장난기를 요리하지 못한 종교개혁자들이 계몽기 철학적 반란을 감당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흔히 면역, 곧 예방적 처리를 못했기에 사단의 여러 술수에 16세기 기독교는 취약했다. 다시 말하면 르네상스적 성향과 기질들은 기독교의 유연하고 능수능란한 대처기능으로 요리하지 못하고, 도시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시골 선비 같았던 16세기 종교개혁 세력은 르네상스보다 훨씬 더 무서운 논리적 철학, 불신앙적 철학, 반(反) 기독교적인 철학적 도발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다.

그게 바로 신·구 기독교 전쟁이 끝나는 1648년부터 1860년대의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까지로 이어지는 교활하고 심술궂은 문화철학, 인문학, 무신론 철학, 기독교를 부정하는 철학적 거사들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17, 18, 19세기까지 기독교는 녹초가 될 만큼 시련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이에 더하여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과 동서냉전기, 1차,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더구나 기독교는 히틀러에게 농락당하면서까지 호된 시련기를 겼었다.

 

5. 끝으로 21세기에는?

지난 500년은 성장통을 동반한 기독교의 성숙기요 성장기였다. 성취도 많았으나 과오도 피할 수 없었다.

왜 과오가 발생했을까? 기독교를 구성하는 주요 부분이 미흡했다고 하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면서 덤벼들겠으나 일단 오늘의 기독교가 예수께서 세우신 모범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고, 또 16세기 개혁자들의 유산을 땅속에 묻어두었던 부분까지 포함해 원형보존에는 정직성을 발휘했으나 기독교의 성장과정에 기독교가 장애요인이었다는 쪽으로 반성하면서 오늘부터 뜻있는 이들의 의견 또는 논리를 펴가는 조그마한 광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하는 인사말로 이 글을 적어본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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