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년 개혁 공론장 향후 1천년의 개혁 / ‌‌종교개혁 ‌ 500주년을 넘어서서 <2>

▲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기독교. 개혁을 외쳤지만 오늘의 기독교는 세계 속에서 가야 할 길이 멀다. 500년을 축하하지만 말고, 오늘 우리의 책임을 더 깊이 성찰하고 모색해야 할 때다. 하늘을 향해 무한대로 자라는 나무처럼.

루터 개혁의 아쉬운 부분-
오늘 우리의 책임, 본질로 다가가 해법 제시해야 미래가 보인다

 

복음의 완전이 이뤄진 예수 메시아의 길에 “일과성 개혁” 행위가 더 이상 진전 없이 멈추게 되면 그 개혁행위는 “복음의 장애 또는 복음의 제한”이라는 불행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16세기 몇몇 개혁자들의 개혁행위가 있은 후 기독교는 더 이상 개혁을 원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개혁의 방해자들이 기독교 안에서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분명히 기독교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16세기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기념현상을 마치 메시아 강림기나 되었다는 듯이 교회들이 떠들어대고 있는 모습에서도 더 이상 개혁은 없다는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그러나 16세기 기독교의 개혁은 한계가 있다. 로마 가톨릭 안에서 지극히 제한적 요구에 머물렀던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항이 역풍현상을 일으켰으며 또한 본격적인 개혁을 말한다 해도 당시로서는 서유럽 일방의 개혁운동이었다.

1517년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출발한 이후 1천5백여 년 동안 서유럽을 포함한 동유럽과 시리아, 앗시리아,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서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아라비아, 이집트 등 전 세계적인 분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은 독일과 제네바에서 시작했고, 로마 가톨릭을 상대로 한 서유럽이라는 한정된 지역의 개혁적 요구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것의 수준 역시 16세기 로마 가톨릭에 저항했던 기독교는 유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 전후로한 개혁에 비해서는 그 무게감이 상대적으로 가볍다.

1. 유대 이스라엘의 개혁

이스라엘은 BC 722년 북왕조가 무너지고 BC 701년 남왕조 예루살렘이 북왕조 파괴세력인 앗수르에 멸망할 위기에 몰렸을 때부터 종교개혁을 시도했다. 요시아 개혁으로부터 시작해 바벨론 포로기, 유다왕국과 예루살렘은 물론 성전까지 무너진 상태에서 바벨론 그발 강가에 마련된 포로 집단촌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은 성경 편집, 개혁, 구전 전승에 머물고 있는 부분들의 문자화를 시도했다.

그것을 통해 성전 중심 시대에서 성경 중심, 곧 성경을 예배와 속죄 신앙과 행위의 중심으로 삼는 새 종교 운동으로 발전했고, 길고 긴 디아스포라 시대를 인내로 견뎌내면서 하나님의 예언을 완성하는 메시아 선언, 하나님이 사람으로 등장하는 인류사 초유의 새 종교 탄생을 완성해 기독교를 세계의 중심 종교요 유일 종교로까지 끌어올렸다.

2. 유대교 변신에 비하면 16세기 기독교 개혁은 소품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가톨릭의 틀에서만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1천5백여 년 동안 제 모습이 많이 훼손된 기독교의 본격 변화에 목표를 두었어야 했다. 조심스러운 표현이기는 하지만 16세기는 예수께서 “내가 다시 오마” 하신 말씀의 화답까지를 목표한 개혁의 출발점이어야 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은 르네상스의 요구도 감당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당시 개혁자들은 겨우 중세를 건너온 보카치오의 근세문학의 도발적 요구에 응수하지 못했고, 초기에는 종교개혁의 우군으로 확신했던 르네상스 우파이며 기독교 철학의 뛰어난 인물인 에라스무스 신부의 개혁론도 사절해버려야 할 만큼 수용능력에 한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랬으니 좌파인 마키아벨리와는 삿바 한 번 잡아볼 능력이 없었다.

더구나 스위스 취리히 쯔빙글리 제자들 7명이 정교 완전분리를 요구하는 본격 개혁 시도를 광신도들의 배신이라고 생각하며 로마 가톨릭 세력보다 더 미워하며 저주했고, 짐승을 죽이듯이 짓밟아버린 행위에서 예수의 다음 단계 포부까지를 요구하는 개혁에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아 보였다. 상품에 비유하면 보세가공품이요 건축물에 비유하면 개축수준도 못된 리모델링 정도의 종교개혁을 시도했었다.

특히 농민반란 진압 과정에서의 마르틴 루터의 행위는 차라리 나는 저들을 모른다, 도무지 저들의 갈등과 요구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서 어느 토굴로 피신했어야지 실력도 없으면서 덤벼들었던 행동은 결코 16세기 개혁자의 품격이나 실력이 아니었다.

16세기가 기독교의 변화를 요구했다면 궁극적인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의 나머지 하나의 예언인 “다시 오마”의 성취를 준비하는 세례 요한까지의 활동을 분명한 목표로 삼았어야 했다.

이스라엘 왕조와 예루살렘의 성전이 무너진 후 그들 이스라엘 민족이 결단했던 수준과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제안은 큰 차이를 내고 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의 본체 전환적 변신은 마치 지구를 둘로 쪼개서 해부하는 듯한 천지개벽과 같은 것이었다. 그토록 충격적인 전환을 했으나 그들은 메시아의 발견에는 절반의 성공 뿐이었다. 16세기 개혁 또한 시대의 벽을 뛰어넘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3. 16세기 개혁의 단계적 과제

16세기 종교개혁은 육상시대에서 해상시대로 본격 전환하는 시기로서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을 자유롭게 오고가는 전 지구적 시대가 온 것이다. 바로 직전까지 천동설 중심으로 포르투갈 해변에서 지구의 끝을 경험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라 포르투갈 어느 선착장에서 배를 띄우면 어느 날쯤에는 제주도 앞바다까지 올 수 있는 시대의 변화가 온 것이다.

또 유럽인들 생각에는 아시아를 야만지대로 알고 있었으나 아시아가 문명과 문화에서 유럽을 앞지르고 있는 사실을 겨우 깨닫기 시작했던 때가 유럽의 16세기였다.

1) 16세기 개혁은 유럽의 틀을 벗어나야 했다.

유럽의 우월감, 로마 가톨릭을 압도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수준의 16세기 개혁은 아직은 세계사 주도권을 주장할 만큼 성장하지 못한 단계였다. 16세기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아니다 행위 동반이어야 한다에 목숨을 걸었고, 예배에 있어서 성찬 시에 화체설이냐 상징설이냐에 명예를 담보했던 수준으로는 세계사 미래를 감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교리적인 사항이지 기독교가 세계를 이끌어야 하는 계획서까지 역사 앞에 내어놓아야만 책임 있는 종교의 자세는 아니다. 그러니 미래 세계인 모두를 위한 축복과 평화의 대안은커녕 집안싸움 과정에서 16세기는 저물고, 17세기 이후는 세속사의 광풍이 몰아닥칠 때 자기 한 몸 피신하기도 힘든 종교가 되어버렸다.

2)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대한 반성과 유럽교회의 나머지 반쪽인 동로마 교회 대책을 내놨어야 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유럽 문제도 미처 해결 못하고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유럽 기독교는 콘스탄티노플을 오스만투르크 이슬람에게 빼앗겨버린 과정을 반성하고 책임 통감이 있어야 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동로마 제국교회의 구원에 대한 최소한의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 반성도 있어야 했다.

며칠 전 기독교 독일 신학자 중 유력한 몰트만 교수가 어느 행사에서 강사로 나서서 16세기 종교개혁의 한계를 지적하고 에큐메니칼적(교회의 일치·연합) 교회를 강조하면서 “당시 종교개혁은 서유럽의 라틴 교회에서만 일어났지 동방정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면서 16세기 종교개혁은 신성로마제국의 전통 속에서만, 기존 (유럽) 교회에서만 일어났다고 말했다.

몰트만의 핵심적 발언에 일부 동의하면서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서유럽에서도 독일 스페인 중심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시대였음을 밝힌다. 더불어서 당시 독일 중심의 개혁세력이 이미 AD 1054년에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정죄 받은 동로마 교회에 종교개혁의 영향력을 나눠 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동로마 지역 특히 러시아는 징기스칸이 유럽 진격을 해오면서 키에프 러시아를 묶어두었기에 르네상스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동로마 교회는 서유럽보다 수준이 낮아서 종교개혁을 주어도 받아서 소화해낼 수도 없었다.

다시 콘스탄티노플 동(신)로마 수도가 이슬람 제국에게 함락될 때(AD 1453년) 서유럽은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당시 동로마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가 교황을 찾아가서 동로마교회를 무조건 교황권 아래 귀속시키겠다고 다짐, 재다짐했다. 그러나 동로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투르크 메흐멧 2세 술탄 군대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유럽 기독교 제국의 절반을 이슬람에게 내주는 결과를 가져왔어야 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이 부분도 역사적인 반성을 해야 한다.

3) 루터는 꾸란을 읽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는 개혁자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고민이 없었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16세기 개혁 그룹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지는 모르지만 종교개혁이란 기독교의 앞날을 향한 포부이기에 개혁자들이 7세기 초 이슬람 등장 이후 유럽 기독교가 반쪽 났으며, 아시아 지역은 이슬람이 선점해버린 점까지 생각할 때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이슬람 문제를 고민하면서, 이 문제만큼은 로마 가톨릭과 공동선교를 하자고 제안하는 등 더 깊은 고뇌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루터는 신학자요 가톨릭보다 더 우수한 기독교의 앞날을 목표한 인물인데 꾸란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4)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아시아 선교에 대한 대책과 아시아 선교의 계획서를 내놓았어야 했다.

십자군 전쟁기 초에 “사제 왕 요한” 문제가 등장하면서 유럽교회는 아시아 선교 현황을 많이 알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의 원 제국을 수십 년 드나들었고, 그밖에 유럽교회는 중국과 몽골, 중앙아시아는 물론 인도나 바그다드까지 아시아 무대에서 기독교가 유럽 못지않게 활동했고, 16세기 현재도 활동 중임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루터는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가 로마교회로부터 파문 받은 일이 있으나 신학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까지 표현했는데 아시아 선교의 중심인 네스토리우스 파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5) 징기스칸이 13세기 초 유럽 문턱까지 위협했으며 세계적 포부를 보여주었는데 16세기 개혁자들은 복음의 세계화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로마 가톨릭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세력에게 유럽의 절반을 내주게 되자 곧바로(AD 1540년 경) 예수회 수도단을 인도, 중국, 동남아, 일본까지 파송하는 등 발 빠른 선교행동에 나섰는데 프로테스탄트는 로마 가톨릭보다 100년 이상 뒤지는 수준이었다.

더구나 징기스칸 세력은 AD 1211년 헝가리 벌판을 통과해 오스트리아빈 광장까지 진격했고, 저 시베리아 가까운 몽골 초원의 원시인 급 정복자가 세계를 경영하겠다고 나섰는데 유럽의 기독교는 예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지 1천5백년이요 로마 제국을 단 하나의 교회로 삼기까지 동·서 유럽을 1천여 년 이상 독점 지배했던 기독교의 16세기 성공적 개혁자들이 겨우 서유럽 울타리 지키기에 하세월 했으니 우리는 그 점을 지적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를 독점하지 마라. 16세기는 앞서 1)~5)에서 지적한 대로 당대에 해결하지 못하면 종교개혁 세력이 피해가지 못할 과제다. 16세기 몫을 감당했노라면서 개혁은 17세기에 이어지고, 최소한 1백년 단위로 개혁의 단위가 상승해 오늘 21세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수준 높은 기독교가 되어서 “다시 오마!” 하신 메시아 예수께서 가까이 와 계심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그 누구도 복음을 제한할 수 없다. 16세개 개혁이 우수한 성과를 내기는 했으나 그것은 16세기의 문화조건 안에서의 수준이고, 인문과 과학, 세계 정신사의 발전 과정에 걸맞은 기독교는 어떤 개혁도 그것은 “과정의 개혁”일 뿐 개혁의 완성일 수 없다. 16세기 개혁을 금과옥조로 알고 있는 신앙과 신학적 수준을 극복하고 계속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16세기형 기독교에서는 무엇이 부족해 기독교가 역사의 무대에서 뒤쳐지고 있는가를 깊이 상고하는 것이 종교개혁 500주년의 과제가 되어야 하겠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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