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21세기 이렇게 대비한다 <40-16>

이신칭의는 구원의 오직 한 길, 곧 왕도가 된다면 만인제사는 구원의 완성인 그 신앙의 열매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가르침을 별도로 말했다가 혼쭐이 났으니 그것은 농민반란에 참견하다가 낭패를 본 일을 말한다. 기독교는 오늘도 만인제사론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이 “이신칭의”를 바로 세운 공헌을 했다면 21세기 종교개혁은 만인제사론의 구체적 실행이고 그 완성도 제시가 될 것이다.

만인제사론은 완전한 신앙, 신앙의 완성을 말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제도적 간격에 매달리는데 그건 관점에 문제가 있다. 기독교 성직은 전문가 단계를 말하고 있다. 이신칭의를 바로 깨닫고 또 온전히 믿는다면 기독교 성직이란 제사장 계급에 해당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중세기 유럽이나 종교계급이 인류를 지배하던 시대의 성직자와 16세기 이후의 목사직은 다르다.

이 문제의 불분명성을 구분해 주는 장치가 만인제사론이다. 이는 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단독자 또 예수님의 도성인신(Incarnation, 道成人神) 과정을 믿고 따를 뿐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이신칭의론”이 출발함을 믿을 때 확신하게 되는 믿음의 영역이다. 단, 이신칭의는 경험 이전일 수 있으나 만인제사는 경험적 과정을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을 만큼 시각적 현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기에 이르러서 모든 기득권이 박탈된 뒤에, 더구나 고국산천을 떠나야 하고, 생명과도 같은 예루살렘의 길마저 차단되었을 때에 홀로 한 분 하나님을 두루마리 성경책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만인제사의 신앙을 터득했다. “만인제사”라는 신학용어는 낯설었는지 몰라도 그들 유대인들은 만인제사의 주인공인 나사렛 예수의 재발견을 이루고 나서 역사의 무대 위에 기독교를 탄생시켰다.

이신칭의를 아느냐? 또 믿느냐? 그러면 만인제사 행위완전(시 119편) 절차과정까지 필요 없이도 바로 그 사람 몫의 신앙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허락받은 신앙에 대하여 깊이 있는 자기성찰이 필요했다. 어떤 사람은 야곱이 모친 리브가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살다가 눈 먼 아비 이삭의 축복을 받아내고서 이스라엘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다. 야곱은 평소부터 조용하고 은밀한 시간을 되도록 많이 가졌고 그 시간들을 하나님과 사귀어 대화하는 데 전폭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 21세기 종교개혁을 통하여 기독교가 본래의 모습대로 유일 절대의 종교적 가치를 뽐낼 수 있게 해야 한다. 바로 이 같은 축복의 날을 앞당기려면 기독교 신자들은 “이신칭의”와 “만인제사”가 동전의 앞뒷면과 다를 바 없다는 확신과 지식에 넘치는 신앙의 열매를 확보해야 할 것이다.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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