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중에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 있다(ㅇ교사라고 해두자). 학교 다닐 때 저런 선생님이 계셨다면 정말 존경하고 롤모델로 삼을 수 있었겠구나, 싶은 그런 분이다. 그분과 최근에 대화를 나누다 자율학습 이야기가 나왔다. 자율학습이 금지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말 자체가 모순처럼 들리지만, 많이들 알다시피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현장에서 시행되던 자율학습의 자율은 학생들의 자율이 아니지 않았던가.

대학에 가는 것이 미래를 보장해주는 상당히 의미 있는 길이었던 몇 십 년 동안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자율적으로’ 밤늦게까지 억지로 붙잡아놓았고, 필요하다 싶으면 때려서라도 공부를 하도록 자극을 주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인격모독과 성적으로만 학생들을 평가하는 부당한 줄 세우기라는 ‘부수적 피해’가 있었지만, 그것은 대학진학이라는 확실한 길을 통해 학생들의 미래를 보장해줌으로써 보상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러 모로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학생들의 학습을 도울 방법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필요하고 시급한 것이지만, 예전과 같은 강제와 우격다짐은 한계에 이른 모양이다.

그런데 타율적 자율학습이 없어지자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한다는 것 외에도 안 좋은 점이 또 있다고 했다. ㅇ교사는 원래 교사나 학생 모두에게 ‘내놓은’ 시간이던 자율학습 시간에 한 시간에 한 명씩 학생들을 상담했다. 그런데 그렇게 확보된 시간이었던 자율학습이 없어지니, 아이들을 상담하기가 쉽지 않단다. 받아놓은 시간을 활용하는 것과 서로가 다 새로 시간을 맞춰내는 것은 다를 테니까.

그런데 o교사가 학생들을 차별하는 교사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상담을 더 자주하게 되는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 주된 상담 대상은 최상위권 아이들과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에 비해 크게 돋보이는 것도 없고 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큰 기대를 불러일으키지도 큰 우려를 갖게 만들지도 않는 대다수의 학생들, 한마디로 그냥저냥 무난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은 아무래도 관심을 덜 받게 된다. 그는 그런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아이들이 제자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에 학교가 그나마 유지되었던 것이고, 교사는 좀 더 눈에 띄거나 관심이 시급한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ㅇ교사에게 연락을 하거나 찾아와서 고마움을 전하는 아이들 중에는 그런 무난한 아이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는 언제 무슨 말씀을 해주셨는데, 언제 어떤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생의 방향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정작 ㅇ교사 본인은 전혀 기억이 안 나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사를 받으면 그날 하루는 교사로서의 보람과 기쁨이 넘쳐난다. 뜻밖의 곳에서 오는 인정과 감사가 ‘내가 그래도 헛일을 하고 있지는 않구나’ 하는 격려로 다가온 것이다.

그런 경험이야 어디 ㅇ교사만의 것이겠나. 번역가인 내가 관심을 갖고 애를 많이 쏟은 번역 작품은 오히려 관심과 평가가 박하기도 하고, 오히려 그에 비해 훨씬 수월하고 별 생각 없이 작업을 진행한 책이 큰 관심과 사랑을 받기도 한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대상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고, 게다가 실망과 좌절만 안겨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가 당장 중요하다고, 시급하다고 생각한 일에만 온힘을 다 쏟는 것은 미련한 일이 아닐까 싶어진다. 덜 중요하고 덜 시급한 다른 것들에도 조금씩 곁을 줄 일이겠다. 그것이 누구에게는 배우자, 자녀, 친구일 수도 있겠고, 신앙일 수도 있겠으며, 이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거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무난한 아이들은 조금만 관심을 주고 이끌어주면 큰 격려와 힘을 받는 법이니. 그리고 바로 거기서 뜻밖의 위로와 기쁨의 보물들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바치고 노심초사하는 그 일이 아니라, 정작 별로 크게 신경 쓰지도 않고 중요성은 더더욱 인식하지 못하고서 했던 그 일, 아주 잠깐 짬을 내어서 했던 그 일이 나의 가장 큰 업적, 내가 남긴 가장 큰 발자취로 기억될 지도 모른다.

홍종락 /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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