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대한민국 NGO 1세대 전문가로서 ‘이웃 사랑’을 몸으로 사는 박종삼 소장(한국글로벌사회봉사연구소)

세 모녀 자살 사건, 우리의 말뿐인
‘거짓 사랑’에 경종을 울리다

생명 다한 사랑, 단순한 복음을
어렵게 만드는 건 십자가 지기 싫은 탓

가난한 이웃 위한 봉사는 교회의 책무,
집합교회로서 생명 살리는 일에 적극 나서야

 

치과의사, NGO 전문가, 목사, 대학 교수… 이 모두가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라니 놀랍다. 다채로운 타이틀만 봐도 쉼 없이 달려온 인생여정을 그려보게 되는데, 그 주인공은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한국교회의 ‘이웃 사랑’ 실천의 길과 교회다움을 고민하고 제시하는 한국글로벌사회봉사연구소 소장 박종삼 목사다.
일제시대와 공산권 그리고 전쟁을 경험했고, 피난민으로, 고아로 살며 고학을 하는 등 고단한 삶에서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 역사의 굴곡 속에서 배운 것들을 남김없이 쏟아내는 봉사의 삶을 지치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힘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생명 사랑”에 있다고 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데 가정이 제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독신으로 살아온 삶, “독거노인으로 사는 게 조금은 불편하지만 은퇴 후 돌아갈 가정이 없기에 죽는 날까지 현역”이라며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해 “줄 것”을 찾고 찾는 박종삼 소장을 서울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월드비전 건물에 위치한 그의 연구소에서 만났다.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하나님 사랑’만 강조하고 ‘이웃 사랑’을 소홀히 하는 것을 짚는 내용으로 시작해 그 원인 분석과 교회가 어떻게 둘 간의 균형을 잡아갈 것인지, 명쾌한 제시로 이어졌다.

<편집자주>

 

▲ 박종삼 소장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대학원 사회사업학 박사
커몬웰스대학대학원 사회사업학 석사
프린스턴신학교 대학원 신학 석사
서울대학교 치의학 학사
2007 제5대 한국해외원조단체협의회 상임대표
2003~2011 제7대 한국월드비전 회장
2001 숭실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사업학과 명예교수
1999~2001 숭실대학교 통일정책대학원 원장
1995~1996 한국사회복지학회 학회장
1982~1984 한국사회사업대학협의회 회장
1979~2002 숭실대 사회과학대학 사회사업학과 교수

△ 월드비전 회장으로 2003년부터 2011년까지 9년간 섬기신 후 한국글로벌사회봉사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계신데요. 근황이 궁금합니다.

- 50년 가까이 사회봉사 현장과 강단에 몸담으면서 느낀 것이 기독교 사회복지 실천에서 평신도의 기능과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저는 요즘 ‘한국교회 사회선교와 평신도’ 주제로 연구와 집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연구소는 그것과 함께 한국교회의 사회봉사와 이웃 사랑에 대해 연구하고 제시하기 위한 곳입니다.

TV 드라마를 보면 각본과 무대, 연출이 잘 되어야 좋은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각본은 있지만 생명을 살리는 ‘이웃 사랑’에 대한 각본이 없어요. 각본이 없으니 무대도 제대로 펼쳐내지 못합니다. 목회자는 설교(각본)를 통해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가르치고 성도들에게 삶의 무대인 가정, 지역, 직장에서 소금과 누룩 되어 예수로 살면서(연출) 변화시켜가도록 해야 합니다.

불교는 물은 물이요 불은 불이라는 쉬운 말로 풀어서 대중에게 다가갑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쉽고 분명한 복음을 어렵게 이야기하거나 은혜와 축복이란 말로 축소해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습니다.

 

△ 기독교 사회복지 실천과 평신도 역할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설명해 주시지요.

- 기독교인으로서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막연한 말로 하지 말고 ‘삶의 자리’로 구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변화시키는 것은 전도 등의 ‘행동(doing)’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내 삶의 자리에서 소금과 누룩으로 ‘존재(being)’하면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눅 4:18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생명의 취약함에 처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도 보다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복음대로 살았던 것에 대해 감사의 찬양을 드리고 그러지 못했다면 그것에 대해 회개해야 합니다. 막연한 감사와 회개로는 나 자신도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이웃 사랑’의 모범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구호·구제사업 하셨나요? 아니요.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생명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전도(교세 확장)나 교회 이미지 재고를 위해 구호·구제사업을 하는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십자가에까지 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목사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의 교회는 자본주의 가치 아래서 목사와 평신도가 서로 잔등 두드리기 하면서 복음을 제한하는 듯 보여 안타깝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평신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평신도를 깨워야 합니다. 평신도 계층은 그 위상과 책임과 사역의 면에서 성직자 계층만큼이나 교회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교회의 본질과 소명에 입각해 증언과 섬김을 위해 세상에 보내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평신도의 특징은 세상 속에 있다는 것, 세상의 수많은 기관과 기업, 관계, 직업 속에 널리 흩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평신도들이 점유하는 삶의 자리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일하는 영역입니다. 평신도들이 삶의현장에서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사랑하는 봉사에서 그리스도는 세상에 증거됩니다.

 

△ ‘이웃 사랑’을 생명 살리기로 말씀하셨는데요. 구체적인 제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 교회가 ‘이웃 사랑’을 단순히 가난한 사람에게 시혜 베푸는 구호·구제 사업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생명 사랑으로 가야지요. 몇 년 전 송파구에서 일어난 세 모녀 자살 사건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송파구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구역으로 선정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교회가 몇 개입니까. 사찰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곳이 있어요. 사회 안정망도 잘 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소위 인간의 양심이 모여 있는 곳인데, 그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우리의 말뿐인 ‘거짓 사랑’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놔두고 교회만 봅시다. 소위 교회의 ‘구역’은 복음을 실천하고 확인하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가 신앙을 훈련받는 ‘태능선수촌’이라면 구역은 실제로 경주하는 ‘올림픽경기장’과 같은 곳이어야지 똑같이 예배하고 출석과 성경 읽은 것, 헌금이 얼마인지 보고하는 정도여서는 안 됩니다.

지역에 우리 교회가 담당해야 할 가난한 이웃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 그들을 어떻게 도울지 구체적으로 나누고 실천하는 곳이어야지요.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이 있는 지하실과 뒷골목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교회도 그곳으로 가서 함께 일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하는 일에는 교회들 간에도 개교회주의를 벗고 ‘집합교회’가 돼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국가기관과 NGO에서 각기 일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 교회는 큰 것 생각하지 말고 그런 부분을 교회의 몫으로 여겨야 합니다.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각 교회의 구역들이 세포조직처럼 지역에 퍼져서 그런 이들을 찾고 교회들 간에 정보 공유하고 자원을 모아 함께 살려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물 한 모금이 생명과 직결되기도 합니다(마 25:35). 교회들이 지금 하는 것들만 모아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 살리시는 곳에 가서 함께 하는 일하는 것입니다.

 

△ 소장님은 역사의 굴곡 가운데 힘겨운 삶을 살아오신 것으로 압니다. 그런 속에서도 끊임없는 공부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삶이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 저는 1936년, 북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철저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으나 일제 강점기, 6·25 전쟁 등 충격과 고통의 시간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특히 14살 때 피란하던 배가 파선되어 죽다 살아나는 등 수많은 사선을 넘으며 인간의 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매 순간이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뼛속 깊이 자리 잡은 믿음의 유산만이 저를 지탱해 주는 힘이었습니다. 홀로 남쪽으로 오게 된 후, 고향에 대한 희망을 품고 미군부대를 따라다녔지만 휴전으로 북에 갈 수 없게 되었고, 홀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어려움과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치과대학에 입학해 치과의사라는 안정적이 삶이 눈에 보일 무렵, 피란 촌에서 비참하게 지내고 있는 피란민들을 접하고 저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14살, 죽음의 문턱에서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다던 그 간절했던 고백을, 어느 순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내 중심에 사로잡혀 그만 잊고 지낸 것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해야 할 사명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진로를 놓고 기도하던 중 ‘신학을 공부해 치과선교사가 되라’는 음성을 들려주셔서 신학교를 다녔고, 광주기독병원으로 내려가 치과선교사로 선교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으며 무의촌, 양로원, 고아원, 광주소년원 등에서 사역했습니다.

그 후 미국에서 신학과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흑인가, 빈민촌 등을 돌며 어려운 일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신학의 본체가 무엇인지, 이는 복음 전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의 시대를 거쳐 치과대학을 나와 신학과 사회복지를 공부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생명을 돕는 데 쓰시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으로 무의탁 비행청소년 마을인 광주 보이스타운을 설립해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후 숭실대 교수직도 맡아 광주와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하며 다른 영역으로도 활동을 지속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순간마다 저를 일깨우시며 선교사역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 왜 독신의 삶을 선택하셨는지요?

- 광주 보이스타운에서 소위 ‘깡패’들과 같이 살던 때가 결혼 적령기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려면 가정을 가지고는 어렵다는 판단에서 결혼을 포기했습니다. 가정이 없었으니 사회선교를 위해 필요한 공부를 하고 연구하고 행동하며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독거노인으로 살려니 불편한 점들이 있지만 그래도 고아 된 나를 가르치고 일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 2002년 25년간 몸담으셨던 숭실대 교수직을 은퇴한 후 또다시 월드비전 회장을 맡으셨는데요.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것 같습니다.

- 숭실대 교수직을 은퇴한 후, 한국교회의 사회선교에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국글로벌사회봉사연구소 전신인 교회사회봉사연구소를 만들었어요. 속으로는 “이만하면 하나님 앞에 할만큼 했다”는 생각도 있었죠. 그러던 중 월드비전에서 7대 회장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지만 6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기에 고사했어요. 그런데 한 목사님이 “죽고 나면 그 많은 지식과 경험, 패기가 1분이면 화장터 불길에 사라질 텐데, 하나님의 자산을 그렇게 날려버려도 되겠소?” 하는 것입니다. 나에겐 심각한 도전이었죠. 당시 외국의 대학에서 객원교수 하며 책이나 쓰면서 쉬자는 유혹도 있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내 몸이 성해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해 일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주변에 은퇴 후에 존재만으로도 힘과 용기가 되는 사람들을 보면서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라”(잠 20:29)하신 말씀이 깨달아지더군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혜와 경험을 나누며 ‘존재’로 힘이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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