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 형 은 목사
말씀삶공동체
성락성결교회 담임

가을이면 통과의례처럼 떠오르는 시가 있다.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다. 가을 그리고 기도, 이 둘처럼 잘 어울리는 언어의 짝이 쉽지 않다. 정신없이 지내다보면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 주변에 누가 있는지, 내 마음자리의 정원이 지금 어떤지 …… 이런 것들은 새까맣게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이런 주제들은 얼른 생각하기에 실용적이지 않다. 현실의 이해관계 속에서 당장 이익이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런 질문들은 모두 삶의 근본에 관련된다. 바쁘게 살다가도 가을이 오면 그래도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게 된다. 김현승의 시는 이런 정서를 담고 있다.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마음이 맑은 이 시인은 가을에 세 가지를 간구하고 있다. 기도하게, 사랑하게, 홀로 있게 하소서. 셋은 모두 관계의 상황을 담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 연관된다. 가을은 위를 바라보고 영원을 사모하는 계절이다.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가끔은 하늘을 바라보아야 산다. 시간의 한계 안에 있는 존재지만 돌아갈 영원한 본향을 마음에 품어야 쉽지 않은 삶의 골짜기를 견디지 않겠는가.

사랑은 다른 사람과 연관된다. 사람은 사람 없이 살 수 없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만나는 본디 방식이 사랑이다.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 어찌 산다고 할 수 있으랴. 사랑하면서야 사람이고 사랑으로만 삶이 삶이다.

홀로 있음은 자신과 연관된다. 사람의 자아는 하나가 아니다. 내 안에 나답지 않은 또 다른 자아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때가 있다. 인정하기 싫고 받아들이기 불편한 누추한 자아를 끌어안고 남모르게 고뇌하는 사람이 사실 얼마나 많은가. 홀로 있으면서 내 안의 또 다른 자아들과 솔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그래야 현대적인 자아의 분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

가을과 기도에 대한 이런 얘기가 지금 우리네 현실에서 사치스런 정신의 유희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북한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느니 어쩌니, 핵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이 초토화 되네 어쩌네, 부동산 경기가 어디로 튈지 모르네, 여야의 정치상황과 사회적 개혁 과제가 산더미인데 어찌될지 모르겠네 등 발등에 떨어진 문제들이 우리에게 산처럼 많다. 가을이니 기도니 사랑이니 하는 상념들이 이런 상황에 무슨 도움이 되나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라. 사람은 언제나 상반되는 양극의 작용으로 산다. 일만 하면 일찍 죽는다. 일과 쉼이 어우러져야 제대로 산다. 남자와 여자의 대조와 상보적 작용으로야 사람 사는 사회가 유지된다.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전통과 새로움은 상극이 아니라 상생을 위한 가치들이다. 보통 쓰는 어감에서 일탈(逸脫)이 긍정적이진 않지만, 단어 그대로 규범적이며 평범한 상황에서 벗어난다는 뜻으로 쓴다면 일상과 일탈 또는 일상과 축제가 조화로워야 삶이 유지된다. 

온갖 문제들을 부둥켜안고 있어도 가을이다. 풀기 어려운 난제들에 짓눌려 있어도 가을이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욱 가을이다. 창조의 사람다움으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기를 희망하자. 야만의 시대에도 신앙의 아름다움과 복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느끼며 전하며 살자. 하늘을 우러르며 다른 이를 사랑하며 내 마음의 정원을 가꾸며 이 가을을 걷자. 조금만 깊이 가을 속으로 걸어들다 보면 거기에서 펼쳐지는 세상을 발견할 테다. 

우리가 사는 사회와 그 세상이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으며 설렘으로 미래를 희망하게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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