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승진 사무국장
(사)한국기독교출판협회

옛날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보면 종종 “OOO의 문하 홍길동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아마도 지금처럼 학력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학위’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일가를 이룬 스승의 위명에 기대어 자신을 알리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스승의 명예에 흠을 남기지 않을 만큼 최선 다해 좇고 있다”는 뜻이 더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대학 학부를 졸업한 학생들의 경우 ‘어느 대학을 다녔다’라고 자기를 소개하지만,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은 으레 ‘OOO교수님의 제자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학계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고린도전서 3장 4절의 말씀, 곧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라는 구절은 교회 내 시기나 분쟁의 양상을 표현한 문구이지만, 조금 폭넓게 수용하면, 그들이 바울이나 아볼로를 ‘지표’로 삼아 신앙생활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표(指標)’는 “방향이나 목적, 기준 등을 나타내는 표지”라는 뜻을 가진다. 때문에 내가 어떤 지표를 갖고 있는가는 내 삶의 방향과 내용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실제 삶에서 혹은 역사적 기록에서 위대한 인물들을 찾아 자신의 지표로 삼고 그 삶을 본받기 위해 애쓴다. 

간혹 범죄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도 듣긴 했는데, 그건 ‘지표’라기 보다는 ‘범죄모델’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즉, ‘지표’는 누군가 본받는 행위로부터 얻을 수 있는 호칭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으로부터 타인과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모범적 삶을 살아낸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예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지표’가 많아지고, 그 미담이 널리 회자되는 사회는 그렇지 못한 사회보다 건강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고, 그로부터 밝은 미래를 맞을 가능성 역시 높을 것이라는 기대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 사회에서, 특별히 한국 교회에서 가장 듣기 어려운 단어가 이 ‘지표’가 아닐까 싶다. 곳곳에서 타인을 향한 냉정한 평가와 비판은 많아진 반면, 누군가의 지표로서 존경받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듣기 어렵다. 아니 더 나아가 ‘지표로 삼을 만한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목소리가 드세다. 세상 법정에서조차 유죄판결 받는 유명 목회자들의 비리와 타락은 이러한 한탄을 강화하고 교회 전체에 대한 사회의 인식마저 ‘우려’로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 나름 오롯이 말씀을 좇아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조차 아주 쉽게 가십거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아주 쉽게 타인의 삶을 단정하고 하찮게 여기며 모욕하기 바쁜 사회가 되고 말았다. 

오늘 우리 한국 사회, 한국 교회의 모습이다. 어쩌면 1990년대 교회의 성장기와 오늘날 쇠퇴기의 차이는 “지표 대신 냉소와 비판”으로 가득 채운 데 있지 않을까?

한국 교회 안에 누군가의 지표가 되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들의 이야기, 즉 삶에 대한 고민과 겸손한 태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향한 열정과 노력이 책으로 만들어져 전해지면 좋겠다. 

그저 ‘복을 받았다’라는 기복 신앙의 간증이나 겸손을 가장한 자기 자랑으로 점철된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들을 비웃는 또 다른 이들의 냉소가 줄어들면 좋겠다. 

철저한 ‘자기반성’과 ‘각오’로 자신을 채근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드러내기 위해 애쓴 그리스도인 ‘지표’가 많아지면 좋겠다. 그런 사람들이 더하고 더해져서 교회가 이 사회의 지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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