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40주년 특집 / 설립자가 직접 기술하는 들소리 40년 역사 회고 감사 및 미래 청사진 (1)

 

●● ‘들소리’ 초기의 결심(결의)

1961년 11월 18일 밤부터 3일 동안 철야 집중기도 중 나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효근아, 내 교회를 바로 세워다오” 하시며 몇 가지 증거도 보여주셨다. 나는 일단 선교회 운영을 위해 발행할 문서 제호를 찾았다. 문서는 주간지와 월간지 형태로 발행할 목표를 세웠다.

먼저 주간지를 위해 이사야 6장 13절을 읽다가 ‘그루터기’를 발견하고 이를 결정했다. 다시 월간지용으로 이사야 11장 6절 이하를 읽다가 ‘들소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팔레스타인이나 중동지역과는 달리 한국에는 광야가 없고 또 광야는 너무 드넓어서 집중력이 약하다고 보고 들, 들의 소리, ‘들소리’로 정했다.

하나님 무릎 아래서 말씀을 배울 수 있다는 친근성까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 나이 그때 겨우 만 19세인데 이름들이 너무 중량감이 느껴지니까 겁이 덜컥 나고, 아직은 준비기간을 좀 더 가져야 하겠다고 조심스런 결심을 했었다.

그때 나는 삼양동 골짜기 판자촌(서울역 건너편 양동·도동 철거민들 강제 이주)에서 7~8명 정도의 이웃들과 공동체 살림을 하고 있었다. 식구들의 먹거리 구하기도 쉽지 않으니 마음만 바쁘게 지내다가 군대에 다녀왔다. 신학대학 생활은 자퇴 등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군대 가기 전부터 교회 부흥집회 인도를 했던 실력을 발휘하여 크고 작은 집회 인도를 했었다. 드디어 선교회 준비 15년만인 1977년 1월 1일자로 ‘그루터기’ 발행을 시작했다.

두 친구가 동행을 요구해서 함께 했다. 마침 그때 전 해에 월간문학 소설에 정식 데뷔를 했더니 몇몇 잡지사에서 작품을 요구해 기도원에 들어가서 3개월쯤 있다가 나오니까 ‘그루터기’ 동행자(동참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두 친구를 불러 “나 친구까지 잃기 싫으니 다 가지고 나가서 자네들끼리 하라”고 말하면서 그들과 결별한 후 4월부터 ‘들소리’를 이어서 시작했다.

사람에 대한 신뢰에 의문을 갖게 되니 ‘들소리’는 그날 1977년 4월 첫 주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사람 만나는 일에 거듭거듭 조심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가슴 깊은 곳 다짐은 내가 세상을 마감하기 전에 ‘들소리’가 먼저 무너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맹세를 하기에 이르렀다. 맹세하지 말라 하셨으나 ‘단 한 번입니다’라면서 나는 깊은 각오를 했다.

 

1) 또 한 번의 가출

나는 1957년 4월 3일 내 고향 나주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고향집을 떠났었다. 명분은 “내가 제2의 아브라함”이라고 당돌한 선언을 하면서 부모님과 상의하지 않고였다.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 단단히 준비한 지 20여 년 만에 나는 ‘들소리’를 통해서 ‘제3개혁 시대를 연다’는 통 큰 자세로 깃발을 내걸었다. 

처자식을 뒤로하고 이불보따리 싸들고 서대문구 북아현동 907번지에 둥지를 틀었다. 3평짜리 사무실, 잠을 잘 때는 사무실 바닥에 이불을 폈다. 아직 초등학교에 가지도 않은 삼남매가 보고 싶으면 초저녁시간 집 가까이 가서 창문 밖에서 삼남매 떠드는 소리를 듣다가 몰래 되돌아서기도 했었다.

2) 교회개혁의 모색

16세기 개혁은 개혁의 단계적 과정일 뿐, 그들 16세기 개혁자들은 마음만 근세인이고 아직 중세의 기질과 성격을 버리지 못한 개혁의 과정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 확신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뛰어넘는 개혁 시대를 열고 싶었다.

3) 제2개혁시대를 발견

1525년 1월 21일 취리히 츠빙글리 문하에서 함께 개혁운동을 하던 이들 7명이 따로 모여서 7인 모두 다시 세례(침례)를 받는다. 집례자는 서로가 돌아가면서 감당했다. 이들을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또는 ‘재세례파’, 급진 개혁그룹, ‘16세기 광신도들’이라고 했었다.

그들 재세례파는 16세기에 이루어진 2차의 종교개혁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아나뱁티스트 세력들은 중세인의 기질과 결별했고, 그들은 근세와 현대에도 가능한 수준의 개혁기독교의 총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초기에 너무 극심한 학대와 비인간적이고 파멸적인 저주를 프로테스탄트들로부터 받으면서 단계적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보스턴 프리머드 항에 도착한 이후, 그들도 신대륙으로 옮겨서 선교활동하면서 현재에 이르렀으나 그들에게도 한계는 있어 보인다.

4) 이제는 제3개혁시대의 출발이다

‘들소리’라는 조각배 하나 창파에 띄우고 어느덧 40년이다. 우리는 지난 40년, 그리고 준비기까지 55년 동안 이렇다 할 수고의 흔적도 없이 세월만 보냈다는 자괴감이 있다.

우리는 해마다 4월이면 창업일(창간일) 행사를 해왔으나 금년 40주년 행사는 지면으로 하게 되었다. 한 일도 별로 없으면서 ‘40년 했소이다!’ 하기가 멋쩍기도 하고, 또 다른 의미로는 이제는 드디어 교회개혁과 교회를 통한 사회개혁까지 복수(複數) 개혁시대를 온몸으로 살기 위한 결단을 해야 한다는 무거운 마음에서다.

 

▲ 들소리신문은 매년 창간을 기념, 감사예배를 드리면서 들소리문학상과 목회신학상 시상식을 드려왔다. 사진은 창간 행사에 참여해주신 운영이사진과 수상자들.


●● ‘들소리’ 초창기 은인들

‘들소리’는 맨주먹의 무모한 출발이었다. 나는 성결교신학교(성결대학교 전신)에 1967년 3월 7일 입학, 2년 후 중퇴했다가 1년 후에 재입학해 1년 후배들과 2년간 공부했다.

이는 다른 신학생들보다 동창 또는 친구가 갑절이 된 것이다. 당시는 대한민국 목사 지망생들의 전성기였다. 입학동기가 50여명, 졸업동기가 또 50여명이었으니 100여명의 끈끈한 동지들, 더구나 선배님들의 사랑도 독차지했던 나는 이들의 덕을 ‘들소리선교회’ 운영하면서 톡톡히 보았다. 은혜를 크게 입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입학, 자퇴, 재입학의 번거로움을 겪을 때는 몰랐으나 거지 생활이나 다를 바 없는 ‘들소리’ 초기에 동창생들과 선배 또 가까운 후배들 상당수가 내게 도움을 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에게 내가 손을 내밀었다. 어떤 친구들은 왜 내게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느냐? 섭섭하다는 이들도 있었다. 친구들(동창들), 선후배들 이름을 다 여기에 적어보고 싶기도 했으나 지면조건이 여의치 않다. 몇분의 우정을 여기에 담아볼까 한다.

 

1) 쌀과 달걀을 쏟아버린 이야기
- 1980년 신림동교회(고 우선구 목사 시무)

이제는 하늘나라에 계신 선배 우선구 목사님이 신림동교회(일명 노랑교회)에 시무하실 때 이야기다. 관악산 중턱에 노란색깔의 신림동교회(새 교회 명 꿈을이루는교회, 담임 이흥배 목사) 1980년 당시 이야기이다. 동갑이면서도 2년 선배인 우선구 목사는 늘 내게 관심이 많았다. 큰일을 해낼 거라고 하기도 하고, 어떻게 저런 큰 고기가 합동 측 같은 곳이 아니고 우리 교단으로 왔을까 하면서 과분한 격려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분이다.

어느 수요일, 노랑교회를 방문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봉투에 돈을 담아주는 것만 아니라 봉지에 가득 담긴 쌀(다섯 되쯤 되어보였다)을 주셔서 어스름한 산길을 내려오다가 나는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봉지에 담긴 쌀이며, 쌀 속에 담아둔 달걀 10여개가 굴러 쏟아지면서 다 깨지고 말았다. 그날 밤, 쌀 보따리와 함께 산비탈에서 굴렀던 추억, 그리고 돈을 더 주지 못해서 정성스럽게 성미와 달걀을 주신 것을 챙기지 못했던 이야기…. 그 어른의 우정과 후배 사랑의 마음은 지금도 내가 ‘들소리’를 지키는 힘이다.

2) 조 목사, 집사람이 쫓아갈 거야!
- 1985년 서대문교회(당시 문한배 목사 시무)

문한배 목사님은 내 졸업 동기다. 늘 겸손하고 침착하며 말씀을 향한 무한한 사모의 소원을 가진 전형적인 목회자다.
문한배 목사에게 1985년도 봄에 찾아가서 어려움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늘 크고 작은 도움을 받던 터라 그날도 이런저런 사정을 말하다가 뒤돌아섰는데 그가 잠깐 기다리라 하더니 3만원인가를 내게 주었다. 고맙게 쓰겠노라고 사무실(당시 서대문 냉천동)에 돌아와서 한 시간쯤 지났는데 문한배 목사의 급한 전화가 왔다.

“조 목사, 내 집사람이 지금 당신을 찾아간답니다. 집사람이 뭐라 해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기다려도 문 목사 사모는 찾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그는 말을 하지 않는다.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서 거듭 요구했더니 문 목사가 내게 줄 돈이 없어서 자기 안사람(사모)의 지갑을 열어 내게 돈을 줬다가 낭패를 보았던 모양이었다.

3) 두 무릎으로 절하고 이사장 부탁
- 1992년 신림제일교회(고 장홍수 목사)

88올림픽을 전후로 해 한국교회는 세계선교를 향해 눈뜨고 도약을 시도했다. 그러나 ‘들소리’는 곤궁함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성장주의에 들뜬 교계 분위기를 관망하고 있었다.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서 공동체 운동에 전념할 것인가 아니면 신문발행까지 겸하면서 자생력을 찾을 것인가에 골몰하며 기도하다가 1988년 1월부터 신문과 회보를 동시발행하기로 결단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기숙사 같은 방에서 우정을 길렀으며, 신림동에서 개척해 교회를 성장시키신 2년 선배님 장홍수 목사가 나를 불러냈다. 무조건 따라오라 해서 함께 갔더니 서울중앙성결교회 이만신 목사님 서재로 뛰어들었다. (두 어른은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다.) 우리 셋은 신문의 현황과 장래성을 말하고, 이사회를 설립하면 좋겠다는 데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장홍수 목사가 “이 목사님, 이사장님을 맡아서 지도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 아닌가. 이만신 목사님은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다른 사람 찾아보라고 냉정하게 잘라버린다. 나는 더 보탤 말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장홍수 목사가 “조 목사, 일어서요. 초대 이사장님께 인사 올립시다” 하더니 큰절을 올리는 것 아닌가. 나도 어정쩡한 자세로 맨바닥에 무릎을 꺾어 누르고 우리 둘은 넙죽하게 큰절을 올렸다.

“어허, 이 사람들이…” 하셨으나 이만신 목사님은 끝내 너털웃음을 지으신다. 나와 장홍수 목사님은 그때서야 서로 마주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장홍수, 존경하는 목사님. 당신도 총회장을 거쳤고, 1천여 명 신자를 이끄시는 목사님이 ‘들소리신문’의 앞날을 위해서 맨땅바닥에 무릎 꿇어 절하면서까지 후배의 선교 앞날을 도우셨는데, 지금 하나님이 부르셔서 내 곁에 계시지 않는다.

 

●● 초대 이사장 고 이만신 목사님

엉겁결에 이사장 감투를 쓰셨으나 신문사 운영하는 내 솜씨를 한동안 지켜보다가 어느 날, “조 목사! 당신은 신문사 그만두고 목회나 하시게. 그것도 도시에서는 안 돼. 저 산골로 가서 할머니들이나 몇 사람 모시고 목회하면서 글이나 써. 내 평생, 신문 한다는 사람이 저렇게 용(순하다, 순진하다, 바보스럽다는 뜻의 남쪽 말)해가지고, 그렇게 해서 신문사 운영은커녕 밥벌어 죽이나 먹겠나” 하시면서도 92년도 어느 날 나를 데리고 방배동 성애성구사 임선제 장로를 만나러 가셨다. “임 장로님, 여기다가 450만원이라고 쓰시오!” 다짜고짜로 방명록을 꺼냈다.

그때 ‘들소리신문사’는 냉천동 골짜기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사무실을 확장하려는데 당시 서대문 로터리와 독립문 방향 간선도로변에 53평 규모의 3층 건물이 2년째 비어 있어서 약간 저렴한 조건으로 임대준비를 하고 계약까지 덜컥 해버린 상태였다. 보증금이 5천만 원이었다. 지금까지 살던 사무실 남은 보증금이 150만원 남은 상태였기에 자칫 계약 파기가 될 수도 있을 때였다. 신문사 형편을 말했더니 이만신 목사님이 당시 그렇게 아무에게나 아쉬운 말을 할 만큼의 처지가 아니었으나 시쳇말로 들소리 사옥 확장을 위한답시고 물불 가리지 않았다고 할까, 체면까지 내던졌다고 해야 할 만큼 애를 써주셨다.

초대이사장으로 3년을 견디시다가 얌전한 것인지 무능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조효근 목사하고 더는 살림 같이 못하겠다고 물러나시며, 내게 와서 큰절했던 장홍수 목사가 맡아보라고 역정을 내며 물러나셨다. 그러나 주의 품으로 가실 때까지 나와 마주치실 때면 요즘 살림살이 어떠냐고 물으실 때, 그 어른의 눈빛이 반짝이면서도 긴장감을 가지고 내 답변을 기다리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장홍수 목사님이 2대 이사장님으로 수고하셨고, 3대는 이병돈 목사님, 4대는 장자천 목사님, 5대는 송기식 목사님이셨다. 이 어른들 중 장자천 목사님 한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 앞으로 가셨다.


●● 들소리회관 준비기간

‘들소리’는 문서선교 또는 신문사 운영을 하려고 시작한 선교기관이 아니다. 지금도 그렇다. 간판(들소리) 만들어 놓고 15년 동안 기도했고, 1977년도 ‘들소리’를 시작한 날 이후 나는 마누라와 삼남매를 피양시켜 나와 같은 절망을 맛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단독으로 남북극보다 더 혹독한 이 세상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먼저 빈들에 나가서 동역자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나는 1960년도에 하나님의 은혜로 16세기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의 1차 개혁이 반쪽짜리이며, 그들은 자기 몸은 중세기에 남겨두고 목만 쭉 뽑아들고 앞으로 다가올 근세기 이후의 세상을 지켜보고 있는 수준으로 본다. 그들은 지동설을 믿지 못하는 유럽 골짜기 촌놈들이 세계화의 꿈을 겨우 꾸고 있는 수준인지라 메시아 예수의 목표치에는 아직 멀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을 떠나 인륜을 차버리고 홀로 싸우다가 죽기로 각오한 길에 일단 홀로 나선 것이다. 

현대 기독교는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지만 계몽기와 불화, 즉 ‘이성과 신앙’의 관계를 정립하지 못했고, 특히 한국교회는 유럽의 계몽기를 피해 도망 다니던 세력들의 집합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몽골리아의 텡그리즘이라고도 하고 물신(物神) 지배의 운명론으로 무장하여 칼빈의 정통 예정론까지 변질시켜버린 악성토양의 터 위에 세워진 기질 사나운 기독교임을 알고 있다.

잘못 심어진 한국기독교, 더구나 7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기초교육기반도 마련하지 못한 한국교회는 16세기 식 역동적인 개혁운동마저 불가능한 마치 차일귀신의 세력에게 장악된 듯한 이 땅의 교회는 제대로 길을 잡기가 쉽지 않음을 거듭 발견하면서 절망하게 되었다.

나는 ‘들소리신문’과 ‘들소리선교회’를 분리할 작업부터 서둘렀다. 그런데 1996년 말 한국경제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1997년 IMF라는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경제난이 오면서 두 기관의 분리작업을 일단 2002년으로 5년을 미루기로 했다.

그런데 1999년 12월 내가 병이 들었다. 2000년 봄 수술, 여름까지 후속치료를 하고 나니 내 육신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내 시대(내 활동기)로 끝날 일이 아니다. 나와 함께 이 일을 해갈 아이들(동역자)이 이제 겨우 삐악삐악하고 있는데 저 어린 것들이 이 험한 세상을 버텨내려면 나와는 다른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 조그마한 둥지라도 하나 마련해 주어야 한다. 초가삼간만큼 한 둥지라도 하나 만들자.

그래서 시작한 것이 회관 짓기 운동이었다. 2001년부터 3년 동안 무조건 집을 보러 다녔다. 돈을 모아둔 것은 아니지만 기도하며 집을 보러 다녔다.

1) 여섯 살 때부터 나를 따르던 김성근 목사

‘들소리’ 영남본부장 김성근 목사(대구 문현교회 시무)는 내가 군 생활 할 때 그 부친(대구 서현교회 전도사)이 20사단 군종부 내 직속사관이었다. 김 목사님은 그때부터 나를 도왔고, ‘들소리’ 시작 후 대구 영남지역 선교를 위해 나를 돕고 있다. 헌신하고, 남보다 먼저 빚 얻어서 회관 헌금도 했다. 이 은혜를 언제 다 갚을 수 있을까?

2) 내 돈처럼 꺼내 썼던 이영훈 목사 주머니

이영훈 목사(성동성결교회 원로)는 각별한 사이다. 그가 장가들기 전까지는 그 사람 있는 곳에 조효근 있고, 나 있는 곳에 이영훈이 있다는 식으로 가까이 지냈다. 그는 오붓한 목회를 하면서 가족들도 나를 형제처럼 여기던 터라 늘 가까웠다. 나는 늘 돈이 부족해서 적은 돈 정도는 이영훈 목사 것을 내 주머니에서 꺼내 쓰듯이 애용했었다(그러나 장가들고는 다르더라).

내 돈처럼 꺼내 썼다고 하니까, 무슨 특검인가 하는 기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 관계에서 ‘경제 공동체’라는 이상야릇한 용어를 만들던데 이영훈과 내가 경제 공동체였다는 뜻이 아니고,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의 적은 돈을 나눠 썼던 우리의 긴밀한 우정의 돈독했던 날들을 회고하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3) 3차 연임 이사장 백종선 목사
 
이렇게 ‘들소리’ 개혁운동 과정에 있었던 친분과 우정의 뒷이야기를 쓰자면 끝이 없다. 훗날 회고록으로 쓸 때로 미루고 현 이사장님이신 백종선 목사(세광교회 담임)에 얽힌 이야기를 몇 줄 쓰고 싶다.
백종선 목사님은 세광교회와 충남 서산에 엘림금식기도원(원장 김진선 목사) 설립자이시다.

나는 거기에 머무시는 주중에는 찾아다니면서 이사장을 한번 맡아 달라, 내가 큰일을 도모하려는데 힘이 되어달라고 3년 정도 부탁해서 이사장직을 수락 받았다. 이 어른은 2년 임기를 두 번이나 담당해 4년을 봉사하셨다. 당회가 압력을 가하니 더는 못 하겠다 하여 원팔연 목사(전주 바울교회 시무)님을 모셨는데 10개월 만에 사정상 그만 두겠다 하여 백종선 목사님께 다시 부탁했다. 다음 이사장 선임 때까지 도와 달라 하여 지금도 걱정하시며 이사장의 임무를 맡고 계신다.

<계속>

조 효 근 /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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