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40주년 특집 / 설립자가 직접 기술하는 들소리 40년 역사 회고 감사 및 미래 청사진 (2)

▲ 들소리신문 사옥
들소리의 이상(理想)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이사야 11:6~8)
 
 

●● 떠오르는 얼굴들
 
왜, 태생적으로 돈을 좋아하지도 않으며 돈을 다룰 줄도 모르며 돈 따위에 내 행복을 부탁하기를 원치 않는 내가 돈이 없으면 해낼 수 없는 일을 해야 하는가?
 
사실, 나 조효근은 15살부터 19살까지 성장과정에서 무자비한 고생을 했다. 이는 생략하고, 19살 겨울부터 삼양동 골짜기에서 군 입대까지 만 2년 동안 공동체 살림을 하면서 겪은 호구지책의 가난도 심했었다. 넉넉할 때는 갑종 밀가루, 어려우면 국수, 더 어려울 때는 마르지 않은 불량품 국수를 사다가 함께 하는 믿음의 동지들에게 먹였었다(1975년 전후로 당시 크리스챤신문에 2년 동안 연재했던 ‘하나님의 손’에 내용이 기록돼 있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은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나의 예수는 가난하셨을까? 나를 가르치시는 70년 동안, 아직도 나의 예수는 매우 가난하시다. 나 말고도 주님이 도우셔야 할 가난한 자들이 아직도 많으신가보다.
 
1) 눈여겨 지켜보았던 고용복 목사
고용복 목사, 그는 착하고 심지가 굳세어 보이던 후배다. 신월동에 자리 잡은 개척지에서 40여 년이 넘도록 목회하는 비교적 성공한 목회자다. 총회장 출마도 사양했다. 그는 긴 세월동안 그는 나의 선교운동에 도움을 주었고 은퇴 이전 10여 년 동안은 매년 늦가을이면 나를 초빙해 선교보고 예배를 인도하게 했으며, 헤어질 때마다 최소 100만원씩을 담아주면서 이겨내라고 격려해 왔다.
 
2) 함석헌 님의 아들 문대골 목사
함석헌을 만나면 목사가 목사를 그만두는데 문대골은 대학시절 함석헌 문하에서 배운 사람으로 뒤에 목사가 된 첫 번째 사람이다. 내가 볼 때 그렇다. 우리는 1970년 7월인가 마하트마 간디 탄생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만나서 지금까지 가슴 깊은 우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벗이다. 그 많은 날 그는 나의 무자비한 가난을 달래주기도 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은 우정의 현재진행형이다.
 
3) 사랑밭 권태일 목사님
복지, 복지신앙운동의 탁월한 실력자로 느껴지는 권태일 목사는 “구제와 나눔”의 전령사라고 할까, 곁에서 지켜보기에 남다른 뛰어난 운동가로 보이는 분이다. 필요할 때마다 신문 광고를 부탁하면 두말없이 응해주시며 따뜻한 격려도 사양하지 않으신 나그네 인생의 동반자요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이시다.
 
4) 내 친구 이윤구 목사
신학교 재학 중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저녁 늦게 이영훈 목사(현 성동교회 원로)와 둘이서 용산구 서부 이촌동으로 갔다. 어느 천막더미 속에서 이윤구 목사(서부교회)가 나온다. 구청에서 와서 예배당 건물을 무허가라며 다 부숴버렸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그 모습을 통해 이윤구 목사의 뚝심을 보았다. 비가 오는 밤, 가로등도 없는 서부 이촌동 둑길.
 
그때 1970년도의 시간으로도 “옛날”이라고 해야 할 1957년에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잠시 넝마주이 노릇을 했었다. 당시 넝마주이들은 아차하면 상이군인 흉내도 내는 험악한 직종이었다. 무허가 건물이라고 다 부숴버린 이윤구 친구 목사의 예배당은 내 기억으로 주변을 어름 잡아보니 넝마주이 시절 내가 머물던 넝마 창고 주변이었다. 아차, 이 글을 쓰다 보니 옛 비밀 한 토막을 쏟아내고 말았구나. 이윤구 목사는 그날 이후 천막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나서 지금은 성실한 목회자로 성공해 원로목회자로 교회와 교단의 지도 인물이다. 들소리 활동의 한 은인이시다.
 
5) 나는 참 안타까운 인생이다
잠시 동안이기는 했지만 넝마주이 시절을 들먹이니까,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보다 더 줄기찬 투혼의 인간 조효근을  다시 떠올려 본다.
 
1957년 4월 서울바닥에 뛰어들어 생존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구두닦이, 신문팔이, 하숙보이, 열차 잡상인, 넝마주이에 노숙자 생활까지 하면서도 정규 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추억을 말하면서, 고난의 초기 사역기를 말하려다보니 그 누구에게도 단 한 번 밝힌 일 없던 개인사까지 말하게 된다. 그래도 아직은 더 이상 말하기 싫은 고난의 날들, 내가 거쳐 온 추가 직종이 10여종 더 있어 그 고비마다에서 ‘죽음“까지는 아니어도 무서운 절망의 늪을 허덕일 때도 나는 학교에 가면 친구들로부터 사랑받았고, 선생님들에게는 모범생이었다. 그래서 고2때는 졸업식 날 졸업생 선배들을 향한 ’재학생 송사‘를 하기도 했었다.
 
그토록 혹독한 날들의 연단을 거치면서도 “내가 제2의 아브라함이 되겠다”는 열망은 무너지지 않았다. 절망의 날들 속에서 주 하나님을 향한 나의 눈물겨운 기도는 날로 더욱 깊어지고, 나는 드디어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겨울밤 주님 예수께서 나를 동행자로 부르셨다.
 
겨우 19살에 전문 지도자가 되고 스무 살부터는 부흥사로 초빙 받아서 크고 작은 교회의 집회를 제법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도봉산 골짜기 공동체의 리더 노릇도 했다.
 
그때 주 예수께 명령 받은 만인제사, 생활신앙, 생활종교, 드디어 하늘의 나라를 지상으로까지 확대시키기 위해 오신 메시아 예수의 허리춤에 매달려서 만인제사.
 
이는 단 한 사람이 완성된 교회이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이기도 한 진리의 근원적 실체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출발점 이후 17, 18세기에는 성공한 유럽은 자유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는데 한국은 19세기에도 봉건과 군주, 다시 말해서 왕권신수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체제로 16세기 종교개혁 맛도 보지 못하여 타락한 중세 로마 가톨릭시절의 수준을 극복하기 힘든 기독교가 정착했다.
 
이 모든 실상을 다 보여주시면서 잘못된 교회를 바로 잡으라 하시니 어찌 감당하는가. 그러나 바보처럼 하는 수밖에 없다. ‘나사렛 예수처럼’이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를 어떻게 줄리어스 시저의 방법으로 이루나? 나는 시저처럼 할 수 있는 자질도 타고 났음을 안다. 그러나 예수 나사렛 그 사람의 방법으로만 말할 수 있고, 그가 말하는 길은 골고다로 향하는 방법뿐임을 그분에게 배웠기에 나는 주의 명령을 받은 그날, 내 목숨 값을 백동전 하나, 즉 100원짜리 정도로 셈하면서 살아왔기에 “들소리 살림”을 만 60년째 해오고 있다. 예비기간 20년, 간판 걸고 40년, 이제 요단강을 막 건넜으니 골고다까지가 몇 년 남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가다가, 걷다가, 뛰고 달리다가 멈추는 날이 나의 골고다가 되지 않을까.
 
6) 쌍둥이 같은 이월량·이기운 목사
2년 이사회 창립 초기부터 이사회에 참여해 때로는 힘들게 돕고, 돕고 싶으나 힘에 부친다고 안타가워하시기도 했지만 든든한 형제처럼 “들소리 운동”에 힘을 보태고 계신다. 요즘은 잠시 이사회에서는 쉬고 싶다고도 하시지만 사실 한두 해도 아니고 돕는다는 일이 쉬운 일인가. 마음 깊이 감사하다.
 
7)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했던 오희동 목사님
내가 성결대 입학시험 보던 날 내 바로 뒷자리에서 오희동 목사님이 편입시험을 보았다. 시험 도중에 오 목사님 시험지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그것을 모르고 내가 밟았다.
 
그날 오희동 목사님과는 시험장에서 인사를 나눴으니 사귄지가 50년이 넘었다. 늘 아껴주시고 가난했던 시절 배고플 때 군것질도 시켜주시고, 그 어른이 사주셔서 돼지 삼겹살을 태어나서 처음 먹었던 날과 그 식당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분은 신학대 교수직에 계실 때 교회사 전공이셨는데 나 또한 교회사 전공, 한 번은 당신의 강의 시간에 나를 초청해 달려갔더니 100여명의 학생을 모아놓고 내게 교회사 특강을 부탁했다. 강의시간 100분 내내 곁에서 지켜보며 나를 격려해주시던 그분의 인품도 생각난다.
 
그런데 “들소리” 시작할 때 오희동 목사님은 적극 만류했었다. “그거 해봤자 수명이 1년이다. 당신은 좀 다르지만 끽해야 2년으로 두 손 들게 되고 당신만 당해! 이건 예언이다. 이게 틀리면 내손을 장을 지지겠다(손에다가 불을 붙인다는 말).”
 
지금도 오 목사님과 만나서 “들소리”가 화제에 오르면 “목사님! 손에 장 지지는 것이 아니라 오 목사님 몸에 불을 질러도 된다”고 말하면서 함께 웃는다. 급한 돈 필요할 때마다 전화로 또 달려가서 졸라대기도 했다. 가족보다 더 든든한 선배님 오 목사님, 건강하세요. 들소리가 목사님의 더 큰 기쁨이 될 때까지.
 
8) 생각 깊은 목회자 박충배 목사님
성결대 입학 초에 나를 문화부 차장으로 선택, 문화부장 박 목사님과 함께 학보, 학교신문을 편집하며, 그때 활발했던 보수교단 연합신학대 임원으로도 함께하면서 열정과 적성의 일치점을 찾았던 1년차 선배님이시다.
 
들소리 하면서도 늘 도움과 협조를 받았다. 박 목사님은 양쪽 덧니가 드러날 만큼 기분 좋게 웃는 삼천포 사투리였다. 아주 어려웠을 때 전북 남당교회까지 찾아가서 손을 벌리는데 그 분은 40일 금식을 막 끝낸 상태였다.
 
무서운 사람, 주요 목회 일정을 소화하면서 40일 금식을 하다니. 뭐가 그렇게 절박했더냐고 물었더니 몇 번 망설이다가 입을 연다.
 
한번은 들판에서 교회의 젊은 집사와 언쟁이 있었는데 억지를 부리기에 웃통을 벗어던지며 “너 혼 좀 나야겠구나” 하면서 다가갔더니 그 집사님이 크게 외친다.
“목사가 사람 때리네! 사람 잡네!!”
 
온 마을에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크게 소리지르는 데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났다는 것이다.
그 사건을 통해서 목회인생의 전환을 시도했다. 금식과 기도 40일 동안에 또 따른 모습의 목회자를 경험했다는 박 목사님. 글을 잘 쓰신다. 청년기에는 시인이 되고 싶었고, 지금은 수필을 쓰는데 설교문이 수필 같고 수필이 설교를 닮은 별도의 맛을 낼 줄 아는 글을 쓰신다.
글도 인품도 깔끔해 영국신사 또는 조선 선비 같은 박 목사님, 이제 은퇴하셨으니 좋은 글 쓰시며, 지금도 “들소리” 도울 일 있나 살펴 주이소.
 
9) 경영과 편집 분리하자신 최이우 목사님
모처럼 충신교회 박종순 목사님, 새문안 교회 이수영 목사님과 함께 종교감리교회 최이우 목사님이 “들소리”를 돕던 때가 있었다. 박종순 목사님은 돕다가 은퇴하면서 떠나셨고, 새문안의 이수영 목사님은 사상이 맞지 않는다면서 좀 더 일찍 그만두셨다. 최이우 목사님이 남아서 돕다가 이사장으로 수고하셨다.
 
최 목사님은 들소리 현장을 지켜보시다가 경영과 편집의 분리를 제안하셨다. 난감했다. 제왕권식 목회풍토인 한국교회에서 만인제사, 곧 개개인의 신앙이 단독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들소리”가 왕 노릇은 혼자 하려드는 목회자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들소리 살림을 자기 일처럼 해줄 수 있을까?
 
만인제사와 생활종교운동을 전개하는 “들소리”가 경영과 편집을 분리할 수 있을까? 이론으로는 가능하지만 “들소리” 개혁신앙 목표에 동의하는 사장님을 무슨 수로 영입하는가? 그래서 “어렵습니다” 했더니 최이우 목사님은 난처해하셨다.
 
10) 동해제일교회 이흥재 목사와 김혜정 사모
이흥재 목사는 지방교회에서 목회하지만 내가 부탁하면 단 한 번도 사양한 일이 없었다. 김혜정 사모는 내가 늑막염으로 고생할 때 약 사주고 주사도 놔주신 간호사였다. 긴 말 필요없다.  아이고, 감사해라!
 
11) 처세술 가르쳐 준 신화석 목사
그가 신학교에 들어왔을 때는 키만 훌쩍한 대꼬챙이였다. 10여 년 후 발산동에서 목회한다기에 가봤더니 세계를 향한 선교의 포부를 진행하고 있었다. 내가 후배에게는 잘 하지 않은 말, 어렵다고 하면 그는 “선배님,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가난 타령이 믿기지 않습니다. 방법을 찾아보세요” 하곤 했다. 그래 놓고도 밥도 주고, 내 자식 등록금도 주고, 선교비도 주었다. 고마운 후배여, 착한 목사여.
 
12) 밥 잘 사주던 정연동 목사, 허광섭 목사
선배님, 고생하시는데 몸보신 하시죠. 그와 더불어 대화가 좋고, 선교비도 필요하고, 먹어 본 기억이 없는 꽃등심으로 몸보신도 시켜주면서 고달픈 “들소리 길 위로도 많았다.
밥 하면, 또 떠오르는 사람, 허광섭 목사. 교단은 다르지만 취재부 기자를 통해 연결된 허 목사는 들소리의 소중함을 간직하며 이사로 참여도 했고, 사무실 가까이 목회지가 있다는 ‘죄’로 “밥”이 필요할 때 연락하면 두말 하지 않고 사곤 한다.
 
13) 번뜩이는 생각 이성범 목사
뒤늦게 나타난 후배, 그가 창원에서 초청하기에 달려갔더니 세속에 찌들은 교회가 부끄러워 좀더 정직한 목회가 하고 싶어서 고민하며 기도하는 기도 그룹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정직하게 하면서 ‘나는 없고’(我無) 주 예수만 그 모습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는 목회를 하고 싶어서 애쓰는 목사님, 고민 중에도 “들소리” 염려도 함께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14) 불교 집 빈자일등(貧者一燈)이 떠오른다.
참 아름다운 말이다. 그 많은 자들 중 너 하나, 지극히 작은 하나였으면 했던 이들이 떠나버린 빈자리도 마음에 떠오른다. 금OO 전도사(통합, 현재 목사), 조무영 등 아깝게 지켜보던 후배와 제자들. 가시밭처럼 느껴지는 구도(求道)의 날들은 길고 지루한 법이다.
 
15) ‘예배안내’를 통한 이사님 교회들과 후원교회들
창동교회(김상렬 목사), 독일교회(송덕준 목사), 바울교회(원팔연 목사), 청주서문교회(박대훈 목사), 든든한교회(장향희 목사), 서울신광교회(유순종 목사), 동광제일교회(김순갑 목사), 신림동중앙교회(나세웅 목사), 큰빛교회(박영규 목사), 주님앞에제일교회(노윤식 목사), 인천금곡교회(임재성 목사), 창곡교회(고병수 목사), 반석교회(전승환 목사), 문래동교회(양준기 목사), 동해제일교회(이흥재 목사), 복된교회(류우열 목사), 꿈을이루는교회(이흥배 목사), 한결교회(장활민 목사), 오삼능력교회(이근민 목사), 신생교회(장자천, 송영진 목사), 성동교회(이영훈, 최윤영 목사), 서부교회(이윤구, 이성은 목사), 문현교회(김성근 목사), 신월동교회(고용복, 고신원 목사), 서종로 장로(신림제일교회)와 전용세 장로(시온의빛교회) 등의 선교비는 들소리신문 운영의 큰 분량으로 자리했습니다. 교회 앞에 감사장부터 올려야 예의인데 지면인사 먼저 드린다.
들소리와 동행하고 있는 교회, 목회자, 성도들은 순수하게 주님의 길에 함께 올곧게 걷고자 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교회에 의지하지 않아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다’는 점을 서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지면을 통해 감사의 인사를 계속하자면 주님앞에제일교회 원로 노태철 목사님을 비롯해 최소한 50명은 더 모셔야 하는데 지면이 쉽지 않군요.
 
 
●● 회관 건립비 준비 이사회
 
고 송기식 목사님(당시 수원성결교회)의 사회로 건립준비를 위한 회의를 시작했다. 모두 같은 마음으로 협조하기로 했고, 수시로 진행과정을 상의하면서 1천만 원을 부탁해 응해주신 분은 2대 이사장 고 장홍수 목사님, 7대 이사장 서종로 장로님(신림제일교회 시무)이시고, 후에 서종로 이사장님은 1천만 원을 한 번 더 해주셨다. 부이시장 이철재 목사님(서울성서교회 원로), 고용복 목사님(신월동교회 원로)도 1천만 원을 헌금해 주셨다.
 
5~3백만 원, 2백만 원, 1백만 원, 10만 원 등을 해주신 목사님들을 무순으로 옮겨본다. 이영훈 목사, 오희동 목사(성광교회 원로), 백종선 목사(세광교회 담임, 현 이사장), 노태철 목사(제일성결교회 원로), 최성균 목사(생명줄교회 원로), 문대골 목사(생명교회 원로), 유태정 장로(한국치과 원장, 흰돌교회 시무), 송기식 목사(수원성결교회 원로), 김기창 목사(그이름교회), 박종국 목사(은혜전도훈련원), 이월량 목사(세광성결교회 시무), 이기운 목사(평강교회), 조성범 목사(직업청소년선교회 대표), 고 우선구 목사(신림동교회), 이윤구 목사(서부성결교회 원로), 장관수 목사(예은교회 원로), 한양수 목사(창동진실교회 원로), 이봉준 목사(흰돌교회 원로)이다.
 
회관 건립비 마련을 위한 과정에서 7대 이사장이신 서종로 장로(신림제일교회 시무)는 더 많이 헌금하시고도 기회만 있으면 더 돕고자 애를 쓰시고 지금도 이사님으로도 수고하신다. 6대 이사장이신 최이우 목사(종교교회 시무), 김영제 목사(선교중앙교회 시무), 이대성 집사(디자인 포비 대표), 정성수 목사(완도중앙교회 시무), 유순종 목사(서울신광교회 시무), 전용세 장로(시온의빛교회 시무)님들이 이사회 조직 안팎에서 힘을 보태주셨다.
 
또 1천만 원, 5백만 원 또는 1백만 원 이상을 헌금하신 분뿐인가. 1만원 단위에서도 독자들이 헌금을 보태셨고, 또 헌금을 하셨으나 그 액수를 밝혔다가는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목사님도 있으니 기록하다보니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회관 건립 마련 목표액 5억 원을 다 채우지 못했지만 2004년 8월 31일(종로구 연건동 195-21) 전세보증금, 담보대출금을 떠안고 있지만 마침내 입주하여 종로5가의 시대에를 열었다.
 
 
●● 우리는 주 예수 앞에…
 
아직도 내가 살아있는가? 일흔다섯 살인데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앞에는 태산보다 높고 파미르고원보다 더 아득한 저 너머를 향한 발걸음은 무겁다.
 
파미르를 말하니 8세기 신라의 구법승 혜초가 생각나고, 15세기와 16세기를 거쳐서 대서양, 인도양을 뛰어넘어 드디어 최초로 태평양 건너 인도네시아 해협에 당도한 1521년 4월 마젤란의 시간도 생각해보았다.
 
어떠한 고난이 우리를 기다린다 하여도 우리는 주 예수의 동행자의 길에 서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메시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신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넘겨주신 하나님 아들의 신실함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허성갑 목사 직역성경).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다. 바울 선생이 다메섹에서 환상 중에 나타나신 예수를 만난 후 10여 년 걸려 사울에서 바울되어 신학적으로까지 정리한 기독론이다.
 
예수의 사람 바울, 그가 5세기에 얻은 어거스틴, 16세기에 얻은 루터와 칼빈이 바울의 3대 제자인데 바울 사단이 아니라 바울 군단쯤 되는 기독교 역사의 큰 인물들도 모두 예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한 사도들이다. 제자는 이렇게 얻는 법일까?
 
오늘 21세기 기독교 개혁은 십자가 신학을 뛰어넘어 부활신학의 현재화를 이루는 일이다. 부활신학의 현재(現在)를 말한다. 문법적 정확도로는 ‘현재완료’가 된다. 예수의 부활, 그 현재완료형 시대를 부르기 위해 ‘들소리’는 아직도 광야와 사막의 시간 속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인고(忍苦)의 날들, 100년은 견디어야만 야자대추만큼의 열매가 모형화 될 수 있으려니 하면서 지금은 조심스럽게 정중동, 간절한 마음으로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글의 마무리시간이다. 이런저런 후일담 속에 지극한 감사를 담고자 했으나 예의를 갖추었는지 잘 모르겠다. 40년 살림을 해오면서 늘 아끼는 분들의 마음에 안타까움을 안겨드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럼 끝맺는 대목에서 한마디로 ‘들소리’에 무슨 소망을 두고 있느냐, 하는 이들에게 ‘개혁시대의 각오 일곱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 싶다.
 
 
●● 개혁시대의 각오 일곱 가지
 
첫째, ‘들소리’는 예수의 복음을 율법의 방식으로 이루려드는 한국교회(세계교회 포함)를 바로잡는 혁명을 해야 한다.
 
둘째, 복음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완성, 곧 만인제사로 성취된다. 그런데 아직도 구약의 성전제사 식 방식으로 예수를 믿는지, 자기 자신을 믿는지 모르는 교회의 잘못된 버릇을 바로잡아야 한다.
 
셋째, 교회를 집단 이기주의나 민족주의 틀 속에 가두어놓고 온 세상을 교회 앞에 굴복시키려드는 사단의 방식을 바로잡아 십자가 복음을 부활의 동작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
 
넷째, 요단강을 건넌 후 천국의 현재를 살지 못하고 늙고 병들어 죽은 후 다시 요단강을 건너겠다는 미신적 신앙을 바로잡아 현재진행형, 또는 현재완료형 신앙을 목표로 해야 한다.
 
다섯째,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말고의 귀를 자르는 제자에게 ‘칼을 거두라, 칼을 쓰는 자 칼로 망한다’ 하셨다. 기독교에서 살생의 칼을 몰아내야 한다. 반드시 비폭력과 불살생의 법칙을 가르치신 예수를 다시 배운다.
 
여섯째,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신 불복종 신앙을 따르겠다.
끝으로 계속해서 교회들의 미숙한 신앙을 거부하고 복음의 방법에서 시도하려는 혁명의 씨앗으로의 ‘들소리’가 되고자 했기에 가난했고, 목사가 ‘들소리’를 읽다가 자기 교회 신자가 오면 감추고, 신자가 ‘들소리’ 읽다가 담임목사님과 마주치면 감춰야 하는 숨바꼭질 시대와 함께 ‘들소리’는 교계로부터도 차별적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왔다.
 
앞으로는 더욱더 강한, 더 정확한 행동강령을 통해서 루터나 칼빈 만큼도 아니고 보헤미아의 얀 후스의 처지가 되거나, 아나뱁티스트의 멘노시몬스 정도, 그 이상의 열매를 거둘지 더 잘하면 공관복음시대를 극복한 에베소의 요한그룹, “예수의 사랑하는 그 제자”의 주순을 허락받고 싶다. 
 
이제 ‘들소리’는 40년차 이후이기에 빌어먹는 거지처럼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본다. 빌어먹었으나 빌어, 곧 기도해서 살아왔으며 거지이지만 클거(巨)요 따지(地)라, 우리는 거지였으나 큰 땅, 곧 온 세상을 교구로 가진다. 주 예수께서 큰 하늘이고 나와 우리는 큰 땅의 포부를 가지고 본격 살림을 하면서 예수를 계속 따르자.
 
큰절하는 마음으로 독자와 회원님들에게 이 글을 올린다.

조 효 근 / 설립자 및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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