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40주년 특집 좌담회 / 만인사제, 왜 필요하고 중요한가?

 

 

 

일시/장소  :  2017. 9. 15. 성락성결교회

좌 담 자 : 지형은 목사 (성락성결교회 담임)
            정재영 교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종교사회학)
            양승록 국장 (본지 편집국장)

 

양승록 국장(이하 ‘양’) : 본지는 창간 40주년과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만인사제’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성경의 근거를 둔 루터의 ‘만인사제’ 정신이 한국교회에서는 여전히 약해 보이는데, 이는 유기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역할을 약하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가 있어왔습니다. 이런 모습으로는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교회공동체를 온전히 세워나가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만인사제’에 대해 말을 꺼내면 평신도들은 대부분 잘 몰랐고, 목회자들은 알면서도 ‘우리의 특권’이라는 보이지 않는 우월성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만인사제는 목회자에게 부여된 목회의 권한을 내려놓으라는 측면이 아니라 ‘역할’만 다를 뿐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은 목회자나 평신도 모두에게 같은 것이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맡겨도 가능한 완성된 신자’의 단계까지 함께 갈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임을 간주하고 좌담회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진행한 설문 결과를 사전에 보내드렸는데요. 보시고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요?

 

 


지형은 목사(이하 ‘지’) : 대강 짐작되는 결과이긴 한데 조금 특이한 게 평신도, 즉 목회자가 아닌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만인사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굉장히 높게 나타났더군요. 특히 ‘평신도도 설교와 성례 집전, 축도를 할 수 있다고 보는가’에서 ‘준비된 평신도는 가능하다’는 응답(목사 32.5%, 평신도 44.9%)이 목사 그룹보다 높게 나온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양 : 저희도 결과를 보면서 그 부분이 생각보다 높아서 놀랐습니다. ‘하나님은 평신도(목사를 제외한 성도)보다 목사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시는가’에 대해서도 평신도 그룹에서 ‘아니다’라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도 의외였습니다.


정재영 교수(이하 ‘정’) : 한국교회 인식과 관련해 설문조사를 많이 해보는데 문항을 어떻게 작성하느냐에 따라서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지난봄에 IVF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진행한 ‘평신도 소명의식에 대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문항 있었는데 거기서는 다르게 나왔습니다. 

‘목회자가 기도해 주는 것이 더 믿음이 가고 잘 풀릴 것 같다’는 문항에 69.8%가 ‘그렇다’고 응답했습니다.

평신도가 안수기도나 설교를 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도 동의하는 응답이 모두 30%를 넘지 못했고, 성례나 축도는 20% 미만으로 응답됐습니다.


지 : 들소리신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서 특정그룹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양 : 본지 독자가 50% 가량 포함돼 있기는 합니다.


정 : 그 정도면 설문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봅니다.


양 : 네, 그런 면을 감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만인사제’가 한국교회에 구현되고 있지 않다고 한 부분이나 그 필요성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왔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정서가 반영된 것이라고 보이는데요. ‘만인사제’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는 어떤 것인지, 한국교회 상황에서 어떻게 발전되어 가는 것이 좋을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지 :  ‘만인사제’는 신학적으로, 교회 역사적으로 보자면 예전을중시하는 교회(High Church, 고교회파)와 아닌 교회(Low Church, 저교회파)가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납니다. 침례교 계통은 평신도가 신앙생활 하다가 목회의 소명을 갖게 되면 회중이 그에게 안수합니다. 즉, 회중으로부터 검증 받은 사람에게 안수하는 것이지 신학공부가 목회자의 기본 조건이 아닙니다. 안수 후에 신학을 하지요. 한국의 침례교 교단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요. 그런 곳에서도 세례까지 평신도에게 허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고교회로 올라갈수록 성례는 성직자만 합니다.

교회사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거룩함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현상적 제도의 연속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저교회파라도 현상적 연속성이 없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가톨릭은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해서 오늘까지 연속성을 말하고 기독교 신교 흐름에서는 성례의 연속성이 있습니다. 세례와 성찬의 연속성이지요. 목회직은 이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세례를 안수 받지 않은 목회자가 주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성찬은 어떤 정도의 여건이 갖춰졌을 때는 가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정 : 목사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단, 제가 근래 ‘가나안교회’에 이어 새롭게 연구하는 주제인 ‘비 제도권 성도’에 대한 부분으로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이거 교회 맞아?’ 할 만큼 제도권을 넘어선 다양한 형태가 시도되고 있습니다. 이런 곳들은 교회 전통에 대해 무시하거나 반대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기존 전통에 따르면 정답으로 여겨지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지 : 네, 정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소위 ‘대안공동체’에서는 성직자나 평신도 구분 없이 설교, 성례 집전, 축도 등이 이뤄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제도권과 아닌 교회, 즉 처치와 파라처치 간의 교류는 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와 수도원도 그렇고요, 가나안교회도 오늘날에 나타난 현상으로 과거와 형태는 다르지만 구조는 똑같다고 봅니다. 유별난 건 아니라는 이야기예요.

정 교수님의 연구 테마에서 대안공동체에 대한 시도는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제도권은 언제나 보수적이고 갇혀있기 때문에 타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럴 때 도전은 외부에서 와야 합니다. 연구하려는 공동체들에 대해 제도권에서도 이단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제도적 현상 속에서 완전하지 못하니까 새로운 대안 가능성은 언제나 시도돼야 하고 끌어안아야 합니다.

오늘날 시대가 바뀌었는데 고민 없이 500년 전 것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례가 뭐지? 세례가 왜 필요하지? 목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고민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대안에 대한 시도도 활발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타락으로 기울어질 때 교정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정 : 종교사회학에서는 제도화된 교회가 아니라 비제도적이고 나름 그들만의 방식으로 움직이는 이들을 ‘소종파(섹트)’라고 표현합니다. 구세군도 성례전도 다르고 굉장히 독특합니다. 처음 출발은 런던의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가 서민층을 상대로 빈민가 등을 찾아가 노방전도를 한 데서 시작됐습니다. 이후 다른 교단에 많은 자극을 주었습니다.

 

 


양 : 예장통합은 한국 장로교회 역사상 유일한 장로 총회장(한영제 장로)이 선출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목사안수 예식의 안수위원에서 장로노회장을 배제하는 시도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평신도의 성례 집전이 불가하다는 것은 ‘만인사제’에 위배되는 것 아닐까요?


지 : 나는 아니라고 봅니다. 루터가 말한 만인사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자녀로서 사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인 누구나 읽고, 살고, 전할 수 있다는 데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적 교회, 제도적인 면에서도 사제의 역할을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루터의 말을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사제직, 목회자직, 이건 신분(身分)이 아닌 직분(職分)입니다.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니라 맡고 있는 일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신분은 다 동일하되 제도적, 가시적 제도 현상 가운데 교회의 거룩한 현상에서 직분을 정확하게 구분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목사가 필요 없다는 건 아니었지요.

만인사제직은 기독교 전통으로 보면 신분으로는 모두가 사제지만 현실적인 사역 안에서 직분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루터가 교회 안에서 목사나 성도가 다 같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직업도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고 영광 받으신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설거지도 하나님 영광 위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성직의 영역을 교회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넓힌 것입니다.

단 궁금한 것은, 오늘날의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과 같은 것은 아닌데 여전히 신분상의 차이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분의 차이는 아니라고 하지만 현실은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양 : 네, 그런 격차가 많은 것 같습니다. 만인사제를 이야기하면 마치 기존 체제를 전복하려는 것으로 여기고 불편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만인사제는 새로운 것을 주장한 것이기 보다 예수께서 제시하신 ‘신인합일의 삶’과 일맥상통한다고 보이는데요.


지 : 인간사의 현실을 생각하면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서있는 입장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지요. 만인사제를 말할 때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세미나에서 만인사제직을 얘기하면 목사들 중에 “그럼 목회직이 위험해지고 교회 질서도 흐트러지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성직주의를 배격한 것이지 성직 자체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만인사제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양 : 성직주의와 성직을 구분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우리나라도 성직주의의 모습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평신도들도 “난 평신도니까” 하면서 신앙생활을 느슨하게 해도 되는 듯이 이해하는 경우도 있고요. 정재영 교수님 지적처럼 직분은 신분이 아닌 역할의 차이라고 하지만 교회에서는 마치 신분이 다른 것처럼 가르치고 평신도들도 그렇게 수용하는 면이 많아 보입니다.

성도 스스로 주체적인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목회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데요.


지 : 글쎄요. 종교사회학적으로 종교의 영적 리더가 갖는 권위는 어디서 나올까요?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을 종교 헤게모니로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이용하면 성직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의 권위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 권위가 시대에 따라, 집단에 따라 어디 걸려있느냐가 달랐습니다. 가톨릭은 신분 자체가 다르다고 봅니다. 예언이나 은사운동 그룹에서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종교지도자의 권위가 걸려있습니다. 교육목회 하는 곳은 체계적인 성경 지식이나 깊은 이해에 걸려있습니다.

종교지도자의 권위가 어디에 걸려있느냐는 것은 다 다릅니다.

만일 종교지도자는 신분부터가 다르다고 이해한다면 그건 신교적인 것이 아니라 가톨릭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목회자들만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루터가 말한 만인사제직은 목회자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적으로 살고 전 삶이 신앙으로 연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정도면 되지” 하고 충족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 삶을 종교적으로 사는 것이 싫은 겁니다. 종교적인 삶은 풀타임 목사가 하고 우리는 적당히 살면 된다, 설교도 편안한 것이 좋다는 안일함이 성도들에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인사제직에 위배되는 성직주의는 목회자가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일반 통속적 종교성에 매몰된 목회자와 성도의 합작품입니다.


정 : 목사님들 중에도 특권의식 가진 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이중직 이슈와 관련해 합동 교단 목사에게 지나가는 말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성경에 제사장은 일을 할 수 없도록 나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신학교에서부터 그렇게 배운 것으로 보입니다.

지형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편에서는 교인들도 적당히 신앙생활 하는 것을 원하고 목회자에게 의존도가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권위에 의존하고 싶어 하는 현상은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지만 한국교회에서는 두드러집니다. 가나안 성도 연구에서도 나타나는 게 기성교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스스로 신앙의 성장·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목사의 권위가 싫어 교회에서 나왔지만 주체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님들이 이런 부류의 성도들을 불편해하기보다 주체적 신앙으로 설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면 좋을 텐데요. 목사님들은 저같이 목회 현장에서 꼬치꼬치 캐묻는 성도들에 대해 불편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웃음)


지 : 기독교 신앙은 합리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혼란에서 질서(합리)를 창조하셨습니다. 더군다나 프로테스탄트는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목회하면서 이런저런 일이 있으면 피하지 않고 얘기해보자고 합니다. 이야기하다보면 못 풀 문제가 뭐 있나요? 저는 정재영 교수님 같은 신자가 계시면 상당히 좋을 것 같은데요. (웃음)

우리가 만인사제직을 목회직에 한정시켜서 얘기하고 있는데, 루터가 이야기한 게 과연 목회직일까요? 루터가 오늘날 교회를 본다면 무슨 얘기를 했을까요? 당시 중세에는 교권이 일반 세속권을 지배하고 교황이 세속적 황제권 위에 있었습니다. 루터는 그게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럼 거꾸로 황제가 교황권을 지배하는 게 옳을까요? 루터는 그것 역시 반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세속정부 이 두 개의 막대기로 통치하며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만인사제직은 가톨릭 성직의 문제이기보다 파고 들어가면 헤게모니, 즉 권력의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교권 가지고 마음대로 힘 부리는 사람들은 목사도 있지만 장로, 평신도도 있습니다. 모두 만인사제직의 비판 대상입니다. 신앙생활 적당히 함으로써 죄의식은 가려주고 삶은 세속적인 것을 따라가는 것, 이것 역시 종교적 헤게모니로 본다면 만인사제직에 위배되는 것이지요.

 

 


양 :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에 신앙을 온몸으로 사는 만인사제가 구현된다면 어떤 희망적 모습을 예측할 수 있을까요?


지 : 인간의 이기심에 빠진 천박한 종교성에 매몰되지 않은 성경적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그야말로 만인사제직이 구현된 모습일 것입니다.


정 : 도발적인 표현일 수 있겠지만 비 제도권의 운동들에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제도권 목사님들은 굉장히 싫어하시겠지만요. (웃음) 제도권을 존중하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양 : 네, 비 제도권에서는 제도권을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제도권에서는 발전적인 도전이 올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본다면 양쪽 모두 희망적이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들소리신문이 하나님의 사역에 더 발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지 :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광야의 소리, 요즘 같은 한국교회에 더더군다나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도권 밖에서 제도권에 자극 줄 수 있는 소리, 이게 출구일 수도 있다 하는 제시를 해 주면 좋겠습니다. 초교파 신문이기에 그런 소리를 보도해 주기를 바랍니다.


정 : 작은 교회들은 생존을 고민하지만 제도권의 안정된 교회들은 절박한 한국교회 현실을 절감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광야의 절박한 소리가 제도권의 안정된 교회들에까지 전달돼 호응되고 대안을 찾을 수 있다면 정반합 해서 합리적인 대안이 도출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언론으로서 한국교회가 봉착한 위기를 알게 하고 대안을 고민할 수 있게 계속 소리를 내 주면 좋겠습니다.


양 : 긴 시간 감사합니다.

정리/정찬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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