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과 노력은 겉모습만 보자면 구별이 어렵다. 아니면서 그런 척하는 것과, 아닌 것을 알기에 달라지려 애쓰는 것은 당장에 보이는 행동만으로는 분간할 수가 없다. 

그 본질적인 차이가 의도와 지향에 있는 까닭이다. 그 둘을 분간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그의 행동과 선택의 궤적이 그려내는 패턴과 경향성을 통해 그가 어떤 존재인지, ‘위선을 떠는’ 사람인지 ‘노력하는’ 사람인지 드러난다.

기독교 신자는 빛을 본 사람. 그 빛 가운데 자신의 어둠을 보고 놀라 빛으로 나아간 사람. 어둠에 익숙한 옛 본성과 빛을 지향하는 새로운 본성이 공존하는 사람. 두 본성 사이의 갈등과 싸움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그 싸움을 꾸준히 계속해가는 것이 노력이라면, 그 싸움이 늘 일방적인 승리인 척하는 것이 위선이겠다. 최근에 C. S. 루이스가 이 문제를 다룬 시를 만났다.


주여, 내 음성을 들으소서, 지금 이 음성을.
한 시간 후에 정반대의 뜻으로
말하게 될 나의 음성(나는 군대이오니)을 듣지 마시고
내 국가에 이제껏 등장했고 앞으로도 등장할
다중의 정당들 사이에서 다수결로 판단하지 마소서.
지금 말하는 것이 ‘나’라는 가장假裝을
받아주소서. 그 가장을 옹호하시어
내 의회를 해산하시고 개입해 주소서.
설령 내가 청한다 해도 주께서는
한번 주신 자유의지를 철회하지 않으시겠지요. 하오나 이 순간의 선택에
부당한 비중을 두소서. 오, 이것을 특별취급해 주소서. 
이것을 실체로 간주해 주소서. 서로 다투는 내 모든 자아들이 동등한 발언권을 갖는다면
아아, 당신은 나를 헛되이 창조하신 꼴이 되오리니.
 

이 시의 제목은 ‘군대’다. 복음서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거라사 지방에서 예수님과 마주쳤던 귀신들린 사람 이야기가 생각날 것이다. 그 사람에게 들린 귀신은 자신을 ‘군대’라고 밝힌다. 수가 많아서 그렇다고. 여기서 군대란 단어는 6천명으로 구성된 로마 군단을 말하는 레기온이다. 루이스는 그 이미지를 가져와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 자신의 내적 현실을 그려낸다.

루이스는 자신을 가리켜 군대라고 말한다. 내가 많다는 뜻이다. 물론 나는 단일한 존재로서 자기정체성을 유지하고 살아간다. 루이스가 그런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자신이 얼마나 한결같지 못한지, 생각과 감정이 얼마나 죽 끓듯 하는지 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변덕이 심하고 식언하기를 밥 먹듯 하고, 늘 흔들리고 딴소리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 안다.

루이스는 그런 인식 하에서 지금 하나님을 갈구하고 찾는, 믿음의 맨 정신으로 있는 이 순간의 자기 음성에 특별히 귀 기울여 달라고 말한다. 한 시간만 있으면 분명히 영 딴소리를 하는 내가 나타날 것이다. 나를 국가에 비유하자면 여러 정당으로 갈라져서 싸우는 의회가 내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수당에 불과한 지금 이 음성이 의회 내에서 정상적으로 발언권을 얻을 길은 없다. 의회 해산(!)만이 답이다.

빈도로 따져도, 강도로 따져도 믿음의 나, 은혜를 구하는 나가 진짜 나, 나의 핵심이라 말하기는 아무래도 어렵다는 거, 시인도 안다. 하지만 제대로 따져서는 절망뿐이기에 시인은 떼를 쓴다. 지금 이 음성에다 가중치를 부여해달라고, 이 음성을 내는 나를 ‘진짜 나’로 보아달라고 간청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폐하시고 억지로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실 리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순간의 선택’을 특별하게 여겨달라고 졸라댄다. 

아주 특별한 은혜를 구한다. 그런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 어디 그뿐이랴. 그의 고백과 간청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홍종락 /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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