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승호
홍성사 편집부장

카셀 도큐멘타에 다녀왔다. 1955년 시작하여 5년마다 열리는 이 초대형 현대미술 이벤트는 해를 거듭할수록 세계 도처에서 많은 이의 발걸음을 향하게 한다.

올해의 슬로건은 ‘아테네에서 배우기’. 특이하게도 올해는 아테네와 카셀에서 동시에 개최되었는데, 아테네 현대미술관 소장품 가운데 중요한 작품 200여 점을 공수하여 주 전시관인 프리드리히 광장의 프리데리아치눔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보따리 작가’로 널리 알려진 김수자의 보따리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곳 외에도 많은 곳에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지도를 따라 이들 작품을 찾아다니며 도시의 분위기와 매력에 젖는 재미도 쏠쏠하다.

시 중심가인 프리드리히 광장 한복판. 멀리서 보아도 탄성을 지르게 하는 조형물이 시선을 끈다. 아르헨티나 작가 마르타 미누힌(Martha Minujin, 1943~)의 〈책의 파르테논〉이다. 파르테논 신전 모양의 엄청나게 큰 구조물이 책으로 장식되어 있다. 비닐에 싸서 다시 비닐로 두른 많은 책이 높다랗게 솟은 60개가 넘는 기둥과, 기둥 위에 잔해만 남은 벽체의 일부를 채우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본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J. K. 롤링이 쓴 《해리 포터》 시리즈, 《파우스트 박사》를 비롯한 토마스 만의 작품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비롯한 괴테의 작품들… 아,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사랑받는 작품들이다. 

제임스 조이스를 비롯하여 브레히트, 발작, 레싱 등의 책도 눈에 띈다. 고전의 반열에 든 많은 작품 외에, 처음 보는 책들도 하나같이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들이다. 사이사이로 페이퍼백으로 된 ‘신약성서’, ‘성서’도 있다. 

작가는 1983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같은 주제와 소재의 작품을 만든 바 있는데, 올해의 이 작품은 카셀 시민들이 중심이 된 ‘금서 모으기’를 통해 모아진 수만 권의 책들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금서라면 우리나라에서도 장년층 이상의 독자들에겐 낯설지 않으며 각별히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학창시절 금서였던 책들이 떠오른다. 시대의 암흑과 혼돈을 헤쳐가게 하며 빛과 소금이 되어 주었지만 사회적·정치적 억압의 희생양이 된 것들이다. 

금서들을 모아서 서구 문명의 상징이자 사원으로 불리는 파르테논 신전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공교롭게도 나치가 금서들을 불살랐던 장소에 전시되어 있다. 작가는 삶과 세계를 사유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비쳤다. ‘예전 금서들에 대한 오마주’이자 ‘검열에 대한 은유’라는 견해도 있다.

종일 시내 곳곳의 전시장들을 둘러보고 다시 이곳 광장으로 와서, 한쪽의 휴게소에서 지친 발걸음을 쉰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이 21세기의 특별한 파르테논 신전은 조명 가운데 또 다른 이미지의 형상을 드러낸다. 낮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작품을 이루는 저 많은 책은 도큐멘타 마지막 날 관람객들에게 나눠줄 예정이라는데, 이 의미 있는 책들과 인연을 맺게 될 독자들의 반응이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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