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영광이라 하자
 
 이스파한 여행 중 방크 교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사산조 페르시아 때에, 또는 그 이전 파르티아 제국 시절에 교회가 설립되었을 것이다. 이 계산은 아르메니아 오르헨 공국이 AD 280년도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다면 그 시간보다 훨씬 이전에 기독교가 이스파한 지역에 설립되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파르티아는 BC 250년 경 제국을 세웠다. 알렉산더 사후 100년도 되기 전에 이란계 유목 부족인 파르니족(parni) 족의 세력화였다. 그들은 그 후 450여 년 동안 현 이란 동부 후라산 고원지대 농산물은 빈약한 곳이었으나 동서 무역로인 silk Road에 위치하여 대상(Caravan)으로부터 통행세를 받아서 재정을 메꾸었다. 파르티아는 알렉산더의 휘하 장수 셀류키드 제국에 속해 있었으나 그 속박에서 맨 처음 벗어났다.
파르니 부족의 족장 아르사세스(Arsaces)는 BC 247년 셀류키드에 반기를 들고 파르티아와 히르카니아 지역을 장악하고 국가를 창설하였다. 파르니 족은 뛰어난 기마전의 명수들이었다. 그들은 패하는 척 도망하여 유인책을 사용하고 달리는 말에서 몸을 돌려 후방 공격술에 능하였다.
파르티아 제국은 450년간 국가 운영을 하다가 AD 227년 파르티아의 수많은 지방 영주들 중 한 사람인 파박(PAPAK)의 아들 아르다시르 1세(ARDASHIR Ⅰ, 224~241)의 조상은 사산(SASAN)으로 알려져 그가 세운 왕조를 ‘사산 조 페르시아’로 이름하였다.
사산조의 출현 연대를 AD 227년으로 한다. 아르다시르 1세는 동부지역으로 진출하여 여러 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이름을 크게 떨치고 ‘이란 족의 왕중 왕’이라 칭하고, 티그리스 강변의 고대 셀루키아를 재건하여 크데시폰과 쌍벽을 이루는 도시를 만들고, 자기 이름을 넣어서 도시를 만들었다.
그의 아들 샤푸르 1세(SHAHPUR, 241~272)는 영역을 더욱 넓혔다. 그는 로마제국의 천적이었다. AD 244년 유프라데스 강변에서 로마 황제 고르디안 3세(GORDIAN Ⅲ, 238~244)를 죽였고, AD 256년에는 시리아의 에데사에서 로마 황제 발레리안(VALERIAN, 253~260)을 포로로 잡을 정도로 샤푸르 1세는 강력한 군주였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초기에 기독교에 우호적이었으나 로마가 기독교를 공식으로 받아들이는 샤프르 Ⅱ세 치세에는 무서운 핍박을 가해 왔다.
우리가 지금 대충 살피고 있는대로 페르시아는 고대 고레스나 다리우스 때는 물론이고, 샤프르 Ⅰ, Ⅱ세 치시는 로마 제국과 박빙을 이루면서 약 3백여 년 간 신물이 나도록 싸웠다. 그러나 AD 640년 아라비아 이슬람은 한나절 전투를 하여 기세를 잡고 결국은 페르시아는 (아라비아) 이슬람의 영토가 되었다.
이스파한은 이슬람 사파위 조의 수도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난 주에 이어 아르메니아인들의 본부교회 격인 방크 교회는 고난시대를 성공적으로 살다간 순절(殉節)의 마디마디를 잇고 있는 기록들과 만난다.
기념 박물관으로 갔더니 어려움 중에도 ‘성경 필사’를 한 사람들의 자료가 여럿이다. 이슬람 시대에도 아르메니아 기독교 사람들은 그들이 제국의 수도 건축 현장의 용병으로 왔기에 별도의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사파위 조 이전에 징기스칸의 후예를 자처하는 티무르 군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온 도시가 죽음의 현장이 되었으나 사파위 조의 수도로 단장하며 재건축, 또는 중세기 도시 계획의 건축물들이기에 규모가 있는 현대 도시 못지 않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도시 한 중간으로 흐르는 강 언덕 양편으로 울창한 숲과 가로수들, 사막의 한복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넉넉하고 아름답다. 나무 한 그루마다 하루에 몇 번씩 물을 주어 기르는 것들이기에 더욱 소중해 보인다.
우리는 이맘 광장에 비해서 그 규모는 크지 않으나 페르시아 이슬람 시대의 첫 번째 이슬람 사원(모스크)인 제메 모스크에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건축 공간의 의미를 살피면서 또한 셀주크 투르크 문화를 만나게 되었다.
셀주크 투르크는 아시아 변방 출신 돌궐족 델주크 가문이 동로마제국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터를 잡았다가 남하하여 에베소 지역에 그들의 세력을 형성하였다. 성지 순례차 터키에 가서 소아시아 쪽 여행을 할 때 에베소 지역 사도 요한 기념교회와 무덤 있는 곳에 가면 그 뒤로 옛 성(古城) 하나가 있다. 바로 그 성체가 셀주크 투르크의 터전이었다.
셀죽 투르크는 1차 십자군 전쟁과 2차 때에 크게 역할을 담당했다. 기독교가 고전했던 초기 십자군은 셀죽 투르크 때문이었다. 셀죽 투르크는 십자군 뿐 아니라 바그다드 이슬람 칼리프를 지탱하는데 공로가 크다. 바로 바그다드 실권을 가진 그들이 이스파한의 ‘제메 모스크’ 건축을 하였다. ‘제메’는 건축학 기술에 있어서도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된다.
‘제메’는 ‘군중 모임’을 뜻하며, 그래서 ‘금요일’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필자는 이슬람 쉬아파의 본산인 이란에 와서 고대 페르시아 시대의 제국이 다리우스, 아하수에르, 다리우스 Ⅱ, Ⅲ세를 거치면서 발칸의 강자 마케도니아의 아들 알렉산더에게 패망하여 페르시아가 헬라시대의 본토가 되었다거나, 헬라제국을 사실상 이어받은 로마가 끝내 페르시아를 수중에 넣지 못하는 한계를 로마제국의 정신적 지주인 기독교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 부체가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BC 530년대 고레스 칙령에 의해 바벨론 포로기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귀한 과정에서 고레스의 정신까지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왔거나, 고레스를 메시아로 보는 자들이 고레스의 가슴에 있는 조로아스터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 사상 속에 있는 조로아스터 정신이 얼마나 많이 기독교에게 유입되었는가를 헤아려야 할 것이다. 생각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로마제국이 헬라의 후신 셀류기드 왕조나, 그들로부터 페르시아를 신속하게 되찾아온 파르티아 왕조나 그 뒤를 이은 사산조 페르시아가 로마제국에게 단 한번도 세가 뒤지지 않았음을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사산조 페르시아는 아라비아 이슬람 세력에게 밀리기 시작하여(AD 640~) 제국을 이슬람에게 넘긴 이후 오늘에 이르러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심각한 것은 오늘의 이란 이슬람이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주목을 해야 한다. 9월이나 늦어도 10월 쯤 이란과 터키를 연결시켜 탐구하는 성지탐사(Mission tour)를 해보고 싶다. 뜻있는 이들, 향후 이슬람과 기독교 관계를 예의 주시하는, 기독교 안에 자리하고 있는 뜻있는 이들을 찾을 것이다. 터키와 이란을 각각 5일씩 배정하면, 앞서 말한대로 ‘터키’가 기독교 유럽과 로마의 터전이라면 ‘이란’이 이슬람과 아시아, 그리고 페르시아의 상징이고 터전이니 ‘동·서 세계 기독교사’에 대한 중요한 암시(탐구)를 받을 것이다.
이란은 쉬아파 이슬람 제국(국가)이지만 그들의 모체인 조로아스터교의 자부심에서 한발짝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금번 여행기에 기록하는 필자의 내용 중,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 우위에 있으며 이슬람의 한계극복에 조로아스터교가 도움을 주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유대교는 옛 페르시아에 진 빚이 얼마나 많은가? 그때 그들은 유대교 정신과 조로아스터 사상의 만남을 가졌는데 그 분량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유대교는 메시아 영접에 실패한 과정을 밟은 것이 아닐까 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기독교 역시 유대교 안에 잠복한 조로아스터 사상이 기독교 안에 잠재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에 불복하고 있는 부분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모세와 유사한 조로아스터 사상이 ‘또다른 모세’의 모습으로 메시아를 위협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또 하나, 6세기 기독교가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를 바로 가르칠 수 없었던 실력의 한계는 기독교의 순수 역량에 미치지 못했던 당시 기독교 현실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페르시아에서 격동하는 셈족의 종파들과 이슬람과 관계를 생각해 본다.
다음날 우리는 쉬라즈(Shiraz)로 갔다. ‘페르세 폴리스’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영광과 그 광활함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다리우스 대왕의 궁전과 크세르세스의 문, 다리우스의 무덤, 아하수에로의 무덤, 다리우스 Ⅱ세의 무덤, 그리고 고레스 대왕의 무덤 등을 보았다. BC 4, 5세기의 제국인데 과연 크다. 주변 왕국들 수십개 나라 왕들의 조공 행렬의 기록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느닷없이 한국교회를 생각해 본다. 기껏해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 반도 골짜기에서 큰 살림 한 번 못해 본 민족이 꾸려가고 있는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수백 조각이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무슨 감동을 준다고 하는데, 글쎄 스케일부터 배워야 하지 않을까.
물론 본질은 스케일이 아니다. 본질은 진리 그 자체이다. 빌라도가 무슨 말인지 몰랐던 진리(眞理)인데 빌라도식 가치에 매달려 있는 교회나 교계가 진리를 알 수 있을지….
다리우스 대왕의 페르세 폴리스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 황제의 통치 공간의 드넓음, 거기에 30여 개 나라 왕들을 불러 마치 황제가 대신들을 불러 모아 놓고 궁정회의를 하듯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모습에서 하늘나라 경영과 하나님 포부도 생각해 보았다. 하늘나라는 다리우스 궁정회의보다 24갑절은 더 크고 웅대할 것이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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