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21세기 이렇게 대비한다 <40-23>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 “믿음”이라는 단어의 계시성과 세속성이 한국교회 신자들을 많이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등장한 “믿음”이라는 단어는 계시성과 세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혼란을 준다. 계시로서의 믿음은 속량하신 주, 나를 대신 죽으신 예수, 그래서 내가 온 생명을 다해서 믿어야 할 대상(신앙)이라고 하지만, 여기까지는 세속어로서도 의미가 통할 수 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죽었다가 또 함께 살아나서 내 안에, 내 생명 안에, 영원히, 서로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 없는 동반자로서의 예수를 믿는다는 경지에 이르러서는 계시어로서의 믿음이다. 도무지 세상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언어가 계시어이다.

그러나 이렇게 계시어와 세속어의 간격을 설명했으나 (솔직히) 이해가 다 되지 않는 경우에 대비해 예수는 나무는 그 열매로 분별하느니라, 고 하셨다.

프로테스탄트 교리학에서는 이신칭의를 이신칭의로만 설명이 가능하고 해석하는데 만족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열매(행위)는 그래서 난처한 상대이다. 열매 있는 신앙, 행위가 동반하는 신앙이어야만 이신칭의의 만족도를 높이는 것인데 행위를 말하려들면 아, 그건 율법의 행위라면서 벌벌 떤다.

믿음과 행함, 믿음과 그 열매의 관계를 서로 불편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리의 터득과정을 너무 쉽게 생각하다가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믿음, 주로 “믿습니다”가 빠지는 함정은 믿습니다, 를 따르는 것은 생각과 생각의 그림자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함정을 방지하기 위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고 기록해 두었다. 여기서 의와 구원의 단계는 믿음과 행함의 단계다. “믿음”이라는 언어 주변에는 관념, 추상, 허상, 귀신, 사탄의 자식들이 끼어들어 신자의 순수한 신앙을 파괴한다. 이의 방지용으로 “입술의 시인”을 제2동작으로 장치해 둔 것이다.

입술의 시인이라는 말은 우리 마음의 결의를 행동으로 옮기는 단계이다. 이 같은 믿음, 곧 이신칭의가 자칫 사탄의 노림수에 걸릴까 싶어서 루터는 독신 사제와 교황권을 버리고 수도원과 수녀원을 짓밟았으나 성찬례에 있어서 화체설과 형제관계 수준의 변체설과 사제복, 가톨릭 교회 자체를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지각이 뛰어난 칼빈은 행위란 제2의 구원의 장치라는 표현을 했다고 전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는 믿음의 교의가 뒤따르는 행위 때문에 손해를 결코 보지 않는다. 오히려 따르는 표적(행함, 열매)이 없을 때 그 신앙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 교회 구성체 안에서 우리 신앙인들의 간절한 고백과 다짐, 그 연민에 찬 눈물이 얼마나 뜨거운가? 그러나 그것이 교회당 문턱을 벗어나서 세속 속에 뛰어들면 일장춘몽이 되기 쉬운 것은 믿음이란, 내가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항상, 세상 끝 날까지 예수는 내 피와 살, 뼈와 근육까지임을 믿는 것이어야 한다.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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