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21세기 이렇게 대비한다 <40-24>

중세 암흑 1천년이라고 했다. 과연 중세기가 암흑기였더냐 했을 때 해당 학자들 간 주장은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 역설 같기도 하지만 중세가 암흑기가 아니었음은 1517년을 필두로 종교개혁이 일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16세기가 기독교의 개혁인 “종교개혁”으로 호칭하게 된 이유는 1천년짜리 한 단위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었기 때문이다.

16세기는 새 종교의 출발점이었다. 종교가 인류를 압도하던 시대와 결별하고 인간 중심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인간 중심의 시대정신은 “만인제사”라는 응축된 이 복합어 하나가 말해준다. 만인제사가 함축하는 의미는 제왕중심시대와 결별하고 신인합일의 신비로운 만남인 메시아 예수의 가르침이 드디어 육화되어 등장하는 시대다. 이 시대의 출발점에 선 16세기 루터나 쯔빙글리, 칼빈 등 화려한 시대의 총아들에게 오늘의 우리 후예들은 마음껏 박수를 보낸다.

사실 1200년대부터 시작된 개혁의 요구가 300여 년 걸려서 또 한 시대를 출발하게 한 근세사 선진들 앞에서 우리는 과연 자랑스러운 후진들이며 후예가 틀림없는가를 반성해 보자.

1. 한국교회는 중세의 벽을 넘었을까?

마치 왕권신수설이나 천동설시대의 교회들처럼 미신과 우상의 덫을 피하지 못한 그 많은 목회자들, 과연 시대의 흐름을 읽고 아브라함처럼 갈대아를 떠날 수 있는 자들을 만나고 싶다. 미신과 우상의 들러리 노릇,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 줄 모르고 벌건 대낮에 골방에 웅크리고 앉아서 촛불신세나 지려는 수준으로는 루터, 칼빈 구경이나 할 수 있겠나.

2. 입으로 중얼거리는 ‘이신칭의’가 너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입으로 중얼거리는 축문이나 염불 외우는 식의 종교는 기독교 가까이에 없다. ‘이신칭의’를 부르짖던 루터는 바울이나 예수의 심정,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며 지켜내는 ‘이신칭의’를 배웠기에 ‘십자가 신학’이 루터의 중심사상이다. 그래서 그는 목숨 내던지고 16세기 종교개혁의 선봉을 지켰다.

3. 종교개혁 500주년은 다시 또 500년을 달려갈 개혁자들의 축제다.

못난 후손으로, 전혀 믿음의 선현들의 몸가짐이나 마음 씀을 흉내도 내지 못하는 자들이어서는 안 된다. 옛 시절 양지바른 곳 다리 밑에 가면 거지들이 모여서 내 5대조는 판서였다.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당상관이었다, 내 조상들 중에는 좌의정 우의정이 많았다면서 설전을 하다가 식은 밥 빌어 온 것 서로 차지하려다가 바가지만 깨더라는 말이 있다.

가슴 속에 큰 뜻을 품자.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이의 음성을 마음으로 음미하면서 500주년 16세기 개혁의 뒤를 잇는 자랑스러운 그들의 후예들이 많이 나오기를 소원한다. /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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