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귀 없고 눈 먼 목사들에게 붙들려서 우맹의 생활하기가 이제는 싫다. 지금 우리 곁에서 멀리 떨어져서 우두커니 우리들을 지켜보시는 예수가 보이는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예수를 예수로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이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는 쉽지 않다.

왜, 그 음성이 들리지 않고 우리 곁에 계시는 그분이 보이지 않을까? 이는 섬기고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내게 준비되어 있지 않고, 그분과 함께 나누어 먹기보다는 나 혼자서 독식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요즘 한국 정치판에 직접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바람이 불고 있다. 역사를 100년쯤 후퇴시킬 바람인데 아마도 한국교회에는 정치꾼들보다 먼저 그 바람을 동원해 자기 몫을 지켜내려는 교회주의 목회자들이 등장해 있을 것이다.

동원식 여론전으로 민심을 회유하고 역사의 시간을 정지시켜버리는 자들 때문에 예수는 곤혹을 치르고 있다. 이는 자기 생각을 가다듬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운 종교가들의 유혹 때문이다. 우리들의 개혁자 루터 선생이 “이신칭의(롬 1:17)” 신앙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지 않던가. 이는 바울 선생이 로마서에 기록했고, 아브라함이 창세기에서 온몸으로 살았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시지 않던가. 이신칭의는 우리 앞에 서신 속량하시는 주 앞에 대속량의 은혜인 십자가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인다, 는 약속의 화답인 것이다.

약속이 있는 열매는 우리의 믿음인데 신자가 예수처럼 산다, 살아간다, 살 수 있다, 살아야 한다까지로 이어지는 연속적 성장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이신칭의의 신앙의 또 다른 모습은 “만인제사”이다. 한국교회가 “이신칭의”는 받아들이면서도 “만인제사”를 거북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중세기 이전의 미신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삯군 수준도 못되는 거짓 목회자들에게 휘둘려서 고달픈 섬놈들, 다시 표현하면 “무인도 신자들” 같은 꼴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과의 수직관계는 대충 꾸려 가는데 이웃이나 교단교회들 간에도 나눠먹지 못하는 탐욕의 덩어리이기에 “무인도 교회(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교회를 미신, 우상, 무당 식을 만들어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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