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제사가 이신칭의 신학을 온전케 한다

▲ 마르틴 루터

교황권 부정의 기반 위에 ‘만인제사’는 ‘이신칭의’를 정당화해 주고, 16세기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해 주었다. 그러나 혁명적 용단으로 출발(1517년)했던 종교개혁은 1525년에 이르러 좌절과 실의의 늪으로 프로데테스운동을 몰아넣었다. 그것은 농민반란자 10만 명의 죽음과 아나밥티스트 열성적 개혁세력이 종교와 정치가 상호의존 관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실패하는 법이라고 외친 선언이 진리임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양대 복병은 천신만고 끝에 개혁운동이 한고비 넘긴 마르틴 루터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었다. 1517년 10월 31일 이후 날마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온 루터에게 1525년 봄은 귀족출신 수녀 카트리나와 결혼까지 하면서 여유가 생겼다. 당시 루터의 목숨을 노리는 두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은 교황 레오 10세와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였다.

그들은 루터를 붙잡아 보헤미아의 얀 후스처럼 화형장의 불속에 집어넣어야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루터의 위상이 커져만 갔다. 더구나 교황은 자기 목이 위기에 처해지자 루터를 잡기는커녕 자신의 교황권을 지켜야 할 처지에 놓여있었다. 신성로마 황제도 루터를 붙잡는 일에서 손을 놓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1525년이 되자,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은 루터는 유럽의 분위기가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환호하는 기대 이상의 인기에 취하고 신변안전은 물론, 로마 가톨릭에서도 루터의 개혁요구를 받아들여 교황제를 폐기하고 “교회 총회제” 선택까지 마음에 두고 루터파와 회합을 시도해오는 단계가 되었으니 루터의 1525년 새해는 너무너무 행복했었다.

 

1) 아나밥티스트(Anabaptist) 신개혁 세력이 스위스 취리히에서 등장

츠빙글리의 유능한 제자들 중 7명이 완전한 종교가 정치에 기대는 반쪽짜리 개혁을 거부하는 재개혁 카드를 들고 나왔다. 종교와 정치가 서로 의존해야 하는 방식은 무늬만 바뀐 또 다른 가톨릭 형식이라고 루터와 츠빙글리 운동에 정면도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루터는 발끈했다. 나쁜 놈들, 사단의 음모에 말려든 아나밥티스트 개혁 세력들로 판정하고 온갖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살해전략을 시도했다. 아나밥티스트, 일명 ‘재세례파’로 명명한 아나밥티스트 세력의 싹이 돋아나는 족족 불태워 죽이고, 땅을 파고 생매장하고, 맷돌을 목에 걸어 강물 속에 던져 넣는 등 버러지 밟아 죽이듯이 했었다.

오죽하면 로마 가톨릭 사람들이 “꼴좋다. 개혁한다고 집 뛰쳐나가더니 제 놈들끼리 죽이고 주는 꼴 볼 만하구나”라고 했었다. 재세례파의 요구는 옳았다. 그들은 ①만인제사 신학을 바르게 세울 것 ②개혁운동은 무조건 비폭력으로 할 것 ③개혁이 아무리 정당해도 정치권력과 야합하지 말 것을 요구했었다.


2) 루터의 갈 길을 막아버린 독일의 농민반란

마르틴 루터는 1월에 일어난 아나밥티스트 세력을 어느만큼 제압했다고 판단하고 수녀 출신 아내 카트리나와 1525년 6월 어느 날 밤 연회를 베푸는 등 신부 출신 루터가 42살의 중년 나이에 장가들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모범 가정을 만들고자 했던 그 시간, 농민반란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들 농민(농노)들이 영주들에게 요구한 12개 항이 좌절되는 순간 농민들의 저항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이었다.


3) 농노들의 타협안 12개 항

(1) 민간(신자)이 직접 자신들의 성직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이에 대해 츠빙글리는 찬성, 루터는 반대했다).
(2) 소소한 십일조는 면제하라(곡물로 내는 십일조는 무조건 낸다).
(3) 노예제도를 폐지하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 받았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선제후들의 합당한 기독교적인 요구는 따르겠다고 했다).
(4) 사냥과 수렵의 자유를 허락하라.
(5) 숲에서 가정용 땔감 얻을 권리를 보장하라.
(7) 계약에 명기되지 않은 가외 부역에는 급료를 지급하라.
(8) 소작료를 인하하라.
(9) 독단적 처벌을 중지하라.
(10) 권력을 무단 점유해온 목초지와 밭을 환원하라.
(11) 고아와 과부들에게서 유산을 앗아가는 차지(借地) 상속세를 박탈하라.
(12) 이 모든 요구사항을 성경에 비추어 검증하되, 만약 성경에 부합하지 않으면 요구를 철회할 용의가 있다.

이상의 합리적이고 성경적인 요구를 하는 ‘농민군 협상안’은 마르틴 루터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 협상안 내용은 <필립 샤프의 교회사 전집> 7권 355쪽에 있다. 루터는 타협을 거부했다. 이 내용도 356쪽을 참조하여 대강을 여기에 옮기면 이렇다.

“농민들의 운명은 루터에게 달려있었다. -중략- 그러나 루터는 폭력 사용에는 시종 반대했다. 다만 위정자가 공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범법자들을 처벌하도록 칼을 위임하셨으므로 정당하다고 여겼다. …생략”

여기, 이 대목에 루터의 착각이 있다. 농민군이 무려 10만 명이 집결해 결사투쟁 할 때까지 그는 무얼 했는가? “위정자의 공권력”이라고 했는데, 가톨릭 측 영주들이 자기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루터 그에게 임시 양도(위임)한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인가? 농민군이 제시한 12개 조항의 답변이 칼이고 권력자의 심판인가? 저들은 12개 항을 무조건 다 요구한 것이 아니라 가감하고 조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 농민군들 앞에 루터가 내민 답변은 “…펜에 피를 찍어 ‘탐욕스럽고 살기등등한 농민들’”을 격렬히 비난했다. 루터는 위정자들에게 저들 농민군은 “미친개들로 여겨 찌르고 죽이고 목을 비틀라”고 부추겼다. 정부를 지키다가 죽으면 그것이 곳 순교일 터이니 농민반란군을 가혹하게 대하라고 가톨릭 영주들에게 루터는 소호하고 있다.

기가 막힐 일이다. 지금 루터 앞에는 폭력의 화신들처럼 보일지 모르나 농민군들은 루터의 “만인제사설”을 믿고 일어선 엄밀한 의미에서 루터의 지지자들이고, 루터의 자식들이다. 저들 10만 명, 저들이 죽으면 저들 젊은이들이 부양하는 부모 처자식을 5명씩만 계산해도 최소한 50만 명의 목숨이 죽고 망하는 시대였는데, 그래도 루터의 눈에는 그 목숨들의 희생이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롬 13:1)는 말로 어물거릴 수 있다고 보았는가?

아니다. 교황권 아래서는 위에 있는 권세가 황제나 교황일 수 있으나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시대는 중세 암흑기를 벗어났기에 “위에 있는 권세”는 교황이나 황제, 또는 봉건 영주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실 뿐이다. 만약 하나님만이 위에 있는 권세자임을 거부하면 바로 루터는 교황의 자식이지 “이신칭의”(롬 1:17) 신앙에 기초한 프로테스탄트일 수 없다. 더구나 루터는 농민군에게 보내는 최후 통첩문 속에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롬 13:1)했고, 또 하나 비폭력을 요구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로마군과 대제사장 군에게 잡힐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하인 말고의 귀를 자르는 폭력을 행사했다. 이때 “칼을 거두라! 칼을 쓰는 자 칼로 망한다”(마 26:52 참조) 하였음을 강조하는 내용까지 최후 통첩문에 담았다. 

루터여! 당신 참으로 시의적절한 대목에서 아주 정확한 성경말씀을 집어 들었는데, 그렇다면 당신의 최후 통첩문 그것이 바로 무서운 살인행위요 살생 집행장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영주들이 농노들 생사여탈권을 루터에게 주었고, 루터가 다시 영주들에게 농노 10만 명을 죽이되 칼과 창으로 찌르든지 목을 비틀어 죽이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통첩문을 주었기 때문이다. 영주와 루터의 세력에게 완전 포위되어 처분만 기다리는 농민반란군은 루터의 동의서에 의해 영주들의 사병과 정부군 등에 의해 청부살인 당했다. 이때 농민들 10만 명의 죽음에 대한 최후의 책임은 마르틴 루터의 몫임을 세계 기독교의 양심은 말하고 있지 않을까?

루터는 칼과 창으로 찌르거나 목을 비틀라고 하기 전에 먼저 그가 농민군을 비무장 상태로 찾아가서 그들의 지휘부를 만나 설득했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도와줄 힘이 없다. 내가 ‘만인제사설’을 들먹여 너희들 가슴에 사람답게 살자,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살자는 용기를 심었다. 여러분, 우리의 선택은 옳았으나 봄은 아직 아닌가보구나. 모두들 무기를 내려놓으라! 그리고 한 사람도 개별행동 하지 말고 시민사회와 정부를 곤혹스럽게 한 우리가 함께 죗값을 받자. 나는 너희들과 함께 가톨릭 영주들 앞에서 죽음으로써 우리의 옳음을 웅변할 것이다”라고 했어야 한다.

그러나 루터는 자기 책임도, 직능도, 프로테스탄트 개혁자의 자격이나 명예도 10만 명 농노들의 시체더미 속에 모두 집어던져야 했다. 루터는 그때, 곧 1525년 7월 농민반란군 집단학살이 있은 후 더 이상 “만인제사론”을 입 밖에 내놓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역사의 시간이란 이렇듯 더디기도 하고, 또 쉽지가 않다. 1525년 7월이 지나면서 로마 가톨릭 안에서 프로테스탄트와 협상은 중단되었다. 전향적 가톨릭 인물들이 행동을 멈췄다. 아나밥티스트 세력들 제압하고 농민반란군을 다루는 솜씨를 보면서 “더 나을 것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차츰 루터를 화형장에 올려서 얀 후스처럼 불태워 죽였어야 하는데 너무 키워줬다는 가톨릭의 여론이 정착해갔다.

 

4) 반 종교개혁(Counter Catholic Reformation)

로마 가톨릭은 이그나시우스 로욜라(1491~1556)를 선택했다. 로욜라는 에스파냐 귀족으로 전쟁에 나갔다가 부상당했다. 치료 중 그는 불구가 되어 더는 전쟁터에 나갈 수는 없으나 영적 전사가 되어 교회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1540년 교황 파울루스 3세에 의해 “예수회 수도단” 설립 인허를 받았다. 이단자들을 처단함은 물론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휘둘리고 있는 교회들을 바로세우겠다는 결의였다.


5) 전쟁터가 되어버린 유럽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교리적인 정당성과 윤리적인 지지를 유럽사회로부터 1차 받기는 했으나 루터의 희망대로 “가톨릭 내부 개혁” 수준의 개혁에 실패하고 교회가 둘로 분립되면서 교회와 민족을 배경으로 하는 각 지역 국가들이 서로를 경쟁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더 쉽게 말하면 종교와 정치가 상호보완의 관계(멍에)를 벗어나지 못하는 생물들임을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모두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1) 독일의 내전

루터가 세상을 떠나는 1546년에 루터의 조국 독일은 내전으로 피를 보기 시작했다. 루터의 심판대였던 보름스 회의장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심문을 받을 때(1521년)를 보라. 그리고 비텐베르크 귀환 중에 작센주 선제후 프리드리히 공이 루터를 위장 납치술까지 동원해 별장인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이끌었던 과정도 살펴보라.

그곳에서 독일어 성경 번역, 그 이후 루터는 신변 안전 확보는 물론 일약 유럽 프로테스탄트 선두 지도자 자리를 굳히는 과정이 교황과 신성로마 황제를 견제하는 작센주 세력 독일인들이 루터 곁으로 모여드는 정치적 방법론, 또는 필요악으로서의 정치기술이 프로테스탄트의 손발을 묵었다.

목숨이 다하기까지 저항하지 않고 비폭력의 원칙을 지키면서 죽어갔던 아나밥티스트의 방법이 루터의 가슴에 떠올랐을 것이다. 루터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곧 1525년부터 154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당성이 없는 종교싸움을 피하지 못했다.

(2) 칼빈의  프랑스 전쟁

칼빈은 독어권인 스위스 제네바 자치정부를 이끌 때(1540~1561)에도 제네바의 개혁운동과 함께 그의 조국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의 확장을 줄기차게 소원했다. 바울의 이스라엘 구원열망처럼(롬 9장) 칼빈은 “위그노”로 호칭되는 프랑스 칼빈파 신교도의 구원을 열망했다.

그러나 칼빈이 세상을 떠난 지 10여년 되던 1572년 큰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날 프랑스 왕의 여동생과 나바라의 앙리 결혼식 날 새벽에 가톨릭 파의 기습으로 결혼식 참석차 모인 귀족 등 사람들이 파리에 모여 숙박하는 침소에서부터 죽임 당했다. 그날 죽은 사람이 2천 또는 3천여 명이라고 전해진다. 위그노들의 일방적 희생이었다. 이 소식이 퍼지자 전쟁은 전국으로 확대되고, 위그노 희생자가 1만여 명 이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3) 네덜란드, 에스파냐·잉글랜드 전쟁은 뒤로하고 30년 전쟁!

1618년에서 1648년까지 16세기 종교개혁기 100여 년을 정리하는 큰 전쟁, 국제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 과정은 뒤로 미루고 결과만을 여기에 일부 옮긴다. 30년 전쟁 동안 독일은 전쟁터를 제공한 셈이다. 30년 동안 독일 땅에서의 전쟁이었다.

전쟁 피해를 몇줄 옮기겠다. <새로운 서양문명사> 상권 717쪽에 한스 야콥 크리스토프그리멜스하우젠(1621~1676)이 30년 전쟁기록의 한 부분으로 그가 15살에 스웨덴 군대의 용병으로 끌려가서 자기 조국 독일에서 합스부르크 에스파냐, 오스트리아, 프랑스, 잉글랜드가 주축이 된 전쟁을 벌였던 대목의 한 부분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스웨덴, 로마 가톨릭의 에스파냐를 유럽의 각 나라 연합전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은 30년을 하루처럼 전쟁 물자를 내놓아야 했다. 양쪽이 전사자가 생기면 독일인들이 보충한다. 30년 동안 10여회 이상을 싹쓸이 당하면서 살아가는 독일인들은 양측 군의 노리개가 되기도 한다. 신·구 기독교 측은 사람 죽이기를 짐승 죽이듯이 했다.

사람을 잡아서 묶어놓고 입을 열게 해 오물을 붓기도 하고, 뜨거운 물을 붓기도 했다. 손가락에 불을 지르고 불붙은 손가락으로 자기 몸에 불을 지르게 했다. 하루는 그의 부모가 이 처참한 인간 학살장으로 끌려왔었다. 그리고 죽어갔다. …, 그만 쓰기로 하자.


6) 1차 마무리

16세기 유럽, 프로테스탄트의 양심은 무엇이었는가? 1천여 년 가다듬은 로마 가톨릭의 양심에 가득 찬 신앙은 또 무엇인가?

우리는 다음 시간에 좀 더 호흡을 가다듬어, 혹시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에 사심은 없는가? 또 기록 내용의 역사적 사실성과 진실성은 어떤가에 대해서도 마치 공동행동자의 마음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후편을 쓰기로 하겠다.

<계속>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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