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외줄타기하며 살아갑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와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고자 했던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분)은 “한 나라의 왕이 어찌 치욕스러운 삶을 구걸하려 하시옵니까?”하며 항전을 주장했고, 치욕을 감수하더라도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던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은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며 화친하여 살아남아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남한산성을 지키는 수어사 이시백은 “장수가 전장에서 죽음을 각오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하여 감동을 주었고, 남한산성의 대장장이 날쇠는 “내가 이 일만 해내면 전쟁이 끝난다고 했다”며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민초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던 왕 인조는 “성 밖으로 나가면… 다음은 어찌되는 것이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는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한 나라의 왕으로서 막중한 책무를 저버린 우유부단(優柔不斷)한 발언이었습니다. 

인조는 서울과 광주를 잇는 한강에 있던 나루, 삼전도(三田渡)까지 걸어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 앞에서 “삼궤구고두례”를 행함으로 우리 역사 이래 근대의 경술국치와 더불어 가장 치욕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조선왕조 인조실록 34권 참조).

김상헌 입장에서 보면 분명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기대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적들이 성을 차례차례 파괴하고 들어온 게 아니기에 전방의 군인들이 성 밖으로 나와 청의 보급로를 끊어줄 것이라 생각할 수 있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즉 삼남지방이 아직 건재하기 때문에 충성된 군사들이 임금을 구하러 남한산성으로 달려올 것이란 믿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군으로 섬기던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서 구해줄 것이란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의 수는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1592)의 수난 이후 정유재란(1597-1598)을 겪었고, 이괄의 난(1624)으로 군사력을 소진하고 정묘호란(1627)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병자호란(1636)을 겪으면서도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판단하지 못한 채 소아적 상태로 있다가 50만 명 이상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이때에 김상헌도 압송되었습니다. 

영화에서 김상헌은 죽음으로 삶을 선택하여 책임지도록 미화시켰지만, 실지(實智)로는 자살하려고 목을 맸지만 가족에게 발견되어 살아났고, 병자호란이 끝나고도 16년을 더 살면서 82세까지 장수하며, 61세에 사망한 최명길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몇 년 후 최명길은 심양에서 김상헌과 2년간 옥살이를 하면서 화해했고, 환향녀(還鄕女) 비하를 금지하는 상소를 올려 비난받기도 했으며, 자손 대대로 역적과 매국노라는 소릴 들으며 멸문지화(滅門之禍) 당했습니다. 그는 왕을 살리고 백성도 살리기 위해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취함으로 만고에 비겁한 자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헌법」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제1조2항)고 규정하여, 군주주권이 아닌 주권재민(主權在民) 원칙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군주주권이든 주권재민이든 “절대권력은 절대부패를 야기한다”는 말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삶을 관조와 관찰로 대체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삶은 미화할 수 없는 실제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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