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고뇌, 후예들의 각오는? <2>

▲ 영화 루터의 한 장면.

16세기 프로테스탄트는 영웅적 출발을 했다. 3백여 년의 준비를 거친 유럽 기독교의 용기는 마르틴 루터의 영웅적인 결단과 함께 말 그대로 요원의 불길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예배당 정문에 내걸었던 95개 조항의 건의문은 교황권이 이를 전면 거부하면서 루터는 원치 않았던 교회 분파 현상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1. 고통스러운 폭력들

마르틴 루터는 어째서 "폭력"이라는 함정을 피할 수 없었을까? 그의 생애의 대강을 스치듯 떠올려본다. 먼저는 광산업자인 그의 부친의 열망은 신분 상승이었다. 부친은 루터에게 법학대로 진로를 잡도록 강권했었다. 루터의 소망은 수도원이었으나 부친의 강권에 의해 법학대학으로 진로를 잡고, 어느 해 여름방학에 친구와 귀향 중 소낙비를 만나서 큰 나무 그늘로 피신했다. 그때 벼락이 우르릉 쾅! 함께하던 절친한 친구가 벼락 맞아 즉사하는 현장을 홀로 목도한 루터는 즉시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방향 전환을 했다고 알려진다.

루터의 정신성향을 탐구하는 후학들 중, 루터의 정신심리를 분석하면서 그의 성장과정의 사건으로 낙뢰의 순간 친구의 죽음 앞에서의 루터를 늘 말한다. 그 이후 루터의 정신 심리의 변화를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루터는 개혁자의 선봉에 나섰을 때 인문주의자들의 달콤한 이론을 늘 경계했었다. 특히 폭력적인 성품을 노출시키는 사람들을 경계했다. 이론의 대가인 에라스무스는 버겁고, 후배요 제자격인 토마스 뮌쩌는 급진적 성격 때문에 경계했었다. 1522년경부터 급격하게 폭력성을 보이던 농민군들이 1525년, 그러니까 3년차 루터의 중재는 어려움을 만났다. 로마 가톨릭이 농민반란 사태를 루터에게 위임했다. 마치 루터를 테스트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루터는 농민반란 세력을 조정하여 사태를 해결하지 못했고, 바로 농민반란 사건 진압과정에서 결코 결백할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기독교 신교의 학자들이나 목사 및 지식층 그리스도인들이 루터와 농민반란 사태를 분리시키고, 농민군은 폭력을 앞세웠기 때문에 스스로 자멸을 불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마르틴 루터를 돕는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사의 비극까지 고민해야 하는 기독교의 책임을 외면하는 철면피한 행위일 수 있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 세계사의 비극, 즉 1,2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 공산당 운동까지 인류가 겪고 있는 모든 불행과 고통을 기독교 특히, 프로테스탄트 기독교가 회피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마르틴 루터의 생각과는 달리, 루터가 개혁자로 성공하는 데 일등공신이요 루터의 가장 큰 후견인이었던 작센주 선제후 프리드리히 공은 임종 직전(1525년 5월)에 “농민(농노)들이 수백 년 동안 학대와 착취로 고통 받았던 것만은 우리들이 기억해야 한다”는 후회의 말을 남겼다. 아마, 그의 이 말은 루터에게 선물한 한 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2. 종교개혁 운동의 계속성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역사의 생명력에 대해 너무 무지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지구 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중 한국교회가 이에 해당한다. 한국교회는 아시아 기독교의 대표다. 일본이나 중국, 동남아시아 중 기독교 성향은 모두 로마 가톨릭적이다. 일본 중국은 이그나시우스 로욜라의 "예수회"가 그 기초를 마련했다. 일본은 로욜라 세력의 2인자인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직접 1550년대에 뛰어들어 기독교를 심었고, 중국도 사비에르가 길을 닦고 마테오 리치 등 1550년대 이후 예수회 교단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심었다. 베트남도 프랑스 식민지 생활 중에 가톨릭이 터를 잡았다. 아시아 전체를 상대로 해도 한국교회가 프로테스탄트의 대표성을 지닌다.

그런데 유럽은 신·구 기독교 모두 일정한 수준으로 성숙해간다. 예를 들면 유럽 기독교는 근세와 현세로 뛰어들어 기독교 존재 가치를 찾고 지켜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중세의 벽, 중세기를 뛰어넘지 못하고 왕조시대의 가치에 매달려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영국과 미국 네덜란드 등 유럽에 선교사를 보낸다는 따위의 말은 조심스럽다. 천자문도 버벅거리는 수준의 학동이 대학, 논어, 시경, 서경을 다루는 선비 앞에 문자 쓰려는 행위와 같으니 말이다.

종교개혁 16세기는 유럽에서도 2백여 년 동안 혼돈 속에 빠져 있었다. 1648년 신·구 기독교 30년 전쟁을 마치자 철학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프로테스탄트는 “지성을 배반”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적인 르네상스”를 학습(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문주의의 황태자인 에라스무스는 칼빈이나 루터의 동반자인 멜랑히톤과는 말이 통했으나 루터와의 갈등은 심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자기를 상좌에 모시기를 원했고 루터는 그 자리를 주지 않았다. 멜랑히톤과 칼빈은 개혁 세력 간의 균열을 생각해서 루터를 앞세우는 듯한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인문주의자들을 정통 기독교로 불러오는 데 차질을 빚었다.

루터나 칼빈의 기운이 떨어지자 1650년대 이후 철학자들의 반란, 이어서 무신론 철학자들의 도발, 그리고 일명 “계몽기”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유럽 세계의 철학계는 정통기독교가 시의적절하게 대응을 못하면서 1860년에 이르러 유대인의 아들인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발표되고, 좌파 세계인들의 결집을 불렀고, 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으며 그들은 지구인구의 절반을 담보로 “종교(기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선언해 종교개혁 16세기의 명예를 짓밟고 말았다.

 

3. 16세기 개혁의 후계 세력은?

곧바로, 1525년 농민반란이 실패로 끝나던 해, 종교개혁 중심마당인 루터의 독일과 신성로마제국의 터전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개혁의 보완세력이 제도 개혁의 횃불을 들었었다. 1525년 1월 21일 저녁 스위스 쯔빙글리의 제자들 7명이 모여서 기독교 다시 시작하자는 결의를 했다. 그것은 유아세례의 관행을 깨고 세례의 본 모습대로 재세례(Anabaptism)의 선언이다.

로마 기독교의 편의와 관행상 출생신고의 또 다른 의미의 “유아세례”는 예수의 신앙고백 신앙과는 다르다면서 자기 죄를 자각하는 나이에 이르러서 받는 세례가 정통적 세례라고 했다.

그러나 세례행위는 하나의 별칭적 표현이고, 재세례파들은 비폭력, 만인제사(평민의 자유)의 실현, 세속정치 세력과의 타협 거부를 선언했다. 그들의 요구 중 돋보이는 부분이 비폭력이다.

이는 루터도 농민반란세력 진압 통보서에 인용했듯이 비폭력은 겟세마네에서 잡히시던 날 저녁 예수의 말씀, “칼을 거두라! 칼 쓰면 칼로 망한다”(마 26:52)에 근거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직접언어다. 육성이다. 그 어떤 부분의 성경내용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군더더기 없는 예수의 언어이다. 폭력 불가이다. 우리는 예수의 이 말씀을 종교개혁 16세기와 별개로 먼저 생각해야 한다. 폭력 거부가 인류 모두의 메시아인 예수의 육성이 분명하다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또 이 말씀이 예수의 육성임에 틀림없음은 그의 그 다음 행위인 “삽자가 죽음”에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내가 열두 영 더 되는 천군천사들을 동원해 저들을 진멸할 수 있다”고 하셨다.

폭력에 취해서 사는 기독교인들 중 이 말씀을 해석할 때 “열두 영 더 되는 하늘 군사(천군)”동원을 보류하신 것은 “…이렇게 되리라 한 말씀이 응하게 하기 위해서”에 있는 듯이 해석한다. 그러나 더 자세히 본문 내용을 접근해 보라. 열두 영 더 되는 천군 동원으로 예수 죽이려는 자들을 진멸할 수 있으나 “이 권세”를 유보하신 뜻이 “이렇게 되리라” 한 예언 성취 때문인가?

아니다. 위의 말씀은 동등한 가치의 표현이다. 천군 동원과 사탄에게 자기 목숨을 내놓는 이 말씀은 어느 말씀이 먼저일 수 없는 동일한 하나의 계시어이다. 두 문장의 앞뒤 차서가 없다.

하나님은 예수 뿐 아니라 인류 구원의 예수 동반자로 그리스도인을 선택하셨는데 모든 기독교 신자는 하늘나라를 앞당기거나, 교회의 입지를 앞당기기 위해서도 폭력을 동원할 수 없다. 분명히 없다.

이는 초기 카타콤 시대(AD 33~312)의 예수와 예수 제자들이 로마의 무자비한 학대와 폭력 앞에서 단 한 번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았음에서 알 수 있다. 믿음의 성도들을 마음껏 희롱하다가 굶주린 사자 굴에 집어넣는 등 악행을 300여 년 동안 계속했을 때도 단 한 번도 폭력으로 맞대응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는 칼을 쓰면 칼로 망하느니라. 칼을 거두어라! 하신 예수의 말씀을 천만금보다 더 귀한 생명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16세기, 루터의 뒤를 이어 제2개혁시대를 연 아나밥티스트 신자들도 그들이 비인간적인, 마치 버러지나 동물 취급당하면서 죽어야 했을 때에도 그들은 비폭력 신앙의 순수와 주 예수 비폭력 명령 앞에서 순결로 임했었다.

정통파 개혁 500주년 아침에 우리 세계 기독교는 신·구 모두 폭력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 하늘나라를 위한 교회운동(사역)이 1천년을 제자리걸음한다 해도 폭력과는 결별해야 한다. 한 점 폭력만 동원된다 해도 폭력과 동무한 오늘 이후의 기독교 선교는 모두 사단의 사업이 되고 만다는 분명한 선언을 하고, 성스러운 종교개혁 501주년을 향하여 나아갈 세계교회는 폭력과는 어떤 명분으로도 가까이하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