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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정치는 동반자 관계종교개혁 과제를 모색한다_1
조효근  |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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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8호] 승인 2017.11.08  16: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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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신분으로 세상에 오셨기에 하나님(예수) 중심의 세상의 질서(화평)를 잡아야 했으나 예수는 세상에 오셔서 정치적 행위를 일체 사양했다(열심당과의 거리). 이로 말미암아 가까이는 가룟 유다의 혼선을 가져오기도 했었다.

바울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롬 13:1)고 했다. 여기에는 바울의 노련한 정치 감각까지 동원된 표현이다. 바울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로마제국의 처사를 그 이면까지 해석하는 정치철학을 알고 있었다. 그는 루터와 같은 “순진한 접근법 따위”의 행등을 하지 않았다. 그는 미래의 로마제국과 기독교(카타콤 이후)를 마음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교회는 로마제국의 적이나 원수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와 충돌은 없다. 마치 기독교 제국이기나 하듯이 로마제국을 하나님이 세우신 정치세력으로 안고, 그의 로마서 13장을 기록했다.

다시 말하면 로마제국을 기독교의 공동제국으로까지 내다보면서 복종을 요구했다. 교회와 왕권의 두 기둥으로 지상의 하늘나라를 구상했다는 해석을 할 수 있다.

 

1. 로마 제국과 기독교

바울의 예견처럼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는 지상권(황제)과 교회권(교회 대표 또는 교황)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AD 313~476년까지). 그러나 AD 476년 서로마 제국이 무너지자 서로마 영토 안에는 교황권이 제국의 형식으로 정치와 종교권을 단일화시키고자 했다.

 

2. 로마 제국교회의 유일성

AD 476년 직후인 AD 590년 그레고리 1세부터 AD 1073년 그레고리 7세의 등장까지는 황제권과 교황권의 균형 또는 충돌의 기간이 순환되면서 기독교는 자기운동(지상교회의 정치적 틀 만들기)을 거듭하면서 성장해갔다. 어떤 사람들은 중세를 “암흑기”라고 단순평가하려 드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중세기 1천여 년은 지상의 하나님나라 만들기 과정이었다. 사실 루터의 개혁시대는 아무나 말할 수 있지 않다. 1천5백년의 복음운동을 경험자원으로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3. 교황의 정치자금을 위한 고뇌

1) 정치가 있어야 하는 교회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잘못 길들여져 왔다. 특히 로마 가톨릭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반쪽짜리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루터 편에서 설명).

왜냐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영적 세계에만 존속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이룬 나라를 이 땅에서도 이루어야 하기에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을 세상에 오셨다. 이분이 기독교의 틀이 분명하다면 예수의 기독교는 로마제국과 함께 하나의 지상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시도를 해야 했다. 사람을 설득해 장차 올 영적 천국인으로 살게 하는 것으로 기독교의 모든 임무가 끝난다면 굳이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 죽음의 절차까지 필요하겠는가? 또, 그렇다면 기독교의 유일성 확보는 쉽지 않을 것이다.

로마 교황들, 특히 그레고리 1세부터 7세까지(AD 590~1085년)까지는 치열한 지상권과의 투쟁을 했다. 그레고리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의 치명적 갈등이 지상권과 교회권 우위 투쟁의 현장이다.

2) 정치를 위한 통치 자금 : 드디어 인노센티우스 3세(AD 1198~1216)에 이르러서는 강력한 교회권 우위를 확보했다. 그는 “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로마교회와 제국을 이끌었다. 그로부터 보니파키우스 8세(AD 1294~1309)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황권을 마음껏 휘둘렀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자칭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으스대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위탁하신 권세를 지나치게 뽐내다가 드디어 아비뇽 유수(AD 1309년)라는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

교황권은 드디어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 이성과 지성이 새롭게 눈을 뜨게 되면서 통치의 어려움이 자주 발생했다. 또 예술과 문화가 발전하면서 통치자금은 무한대로 필요했다. 교회나 기념 건물들의 증개축은 물론 신축까지 서두르는 과정에서 베드로 기념 예배당 건축비용 문제까지 교황권의 금고는 많은 돈이 필요했었다.

바로 마르틴 루터의 95개항 항의문 속에 나타난 “면죄부” 발행마저도 단순 교회의 선교목적을 벗어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정치적 비용까지가 뒤섞여 있었다.

3) 루터의 고뇌와 갈등

순수한 신앙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의 눈에는 로마 가톨릭 교황과 주교 등 지도부의 부도덕성과 “면죄부 사건”에서 상상력에 도움을 더 받기도 했겠으나 “이신칭의” 신앙의 순수성 되찾기, 모든 신자가 자유롭게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요구들만 보였을 수 있다.

두 제국 이론에 머물러 있는 중세인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루터는 1520년과 1523년에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세속 당국에 대하여’라는 소책자를 집필했는데 그의 주요 요구는 하나님의 나라 좌편에는 황제가 다스린다. 그러므로 그가 정의를 세우려 할 때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우편에는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사(聖事)를 가지고 통치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독일의 농민반란과 이 사태 수습 과정에서 영주들로부터 해결사 임무를 맡은 후 농민군들을 혹독하게 다루었으며, 그들을 저주하고 짐승처럼 취급하라는 요구를 영주들의 진압군들에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루터의 가치관 내부의 갈등이 먼저다. 루터는 하늘나라 좌편에는 황제, 우편에는 예수의 교회를 말하면서 바울 선생의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는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문자적인 해석으로 끝냈다. 겨우 황제로부터 권력을 분할받은 봉건 영주들에게 굴복하라고 해석함으로 그 자신이 이 함정에 빠져버렸다.

<계속>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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