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천년여행 [ 222 ] / 사제 왕 요한 27

태자 요한이 한걸음에 달려온 황궁은 저녁 어둠에 잠겨있었다. 횃불을 대낮처럼 밝혀 놓았으나 적막감을 거두어내지 못했다. 황궁 경비가 삼엄한 틈새로 태자 요한이 유드게스 장군의 호위를 받으며 사마르칸트 별궁에 당도했다. 태자는 야율 이열 카간(황제)의 침궁으로 달려갔다.

“아바마마! 소자가 왔습니다.”

태자가 소리치며 황제의 무릎 아래 머리를 숙였다. 을지 고 사령관이 태자를 말없이 부축해 황제 곁으로 이끌었다.

“아바마마!”

태자가 황제의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황제가 간신히 눈을 떴다. 그의 얼굴은 잿빛이고 눈자위 주변은 자줏빛 가까운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황제는 애써 미소지어보이며 태자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까지 이끌었다. 긴요한 말을 하려는 듯 마른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길을 찾고 있었다.

“폐하! 천천히 말씀하소서. 이미 태자마마는 황명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나이다.”

을지 고가 나서서 황제의 서두름을 돕고 싶어 참견했다. 황제가 을지 고를 향해 눈을 흘긴다. 그러나 곧바로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한 손으로 손짓한다. 가까이 오라는 뜻으로 알고 을지 고가 황제 가까이로 다가섰다. 그는 태자를 잡았던 손을 놓고 을지 고의 손을 이끌어 그더러 태자의 손을 잡으라고 손짓했다. 태자가 부왕의 속뜻을 알아차리고 을지 고의 손을 두 손으로 마주잡았다.

“아바마마! 무슨 뜻인 줄 소자는 아옵니다. 을지 고 사부를 아바마마처럼 따르라는 뜻인 줄 소자는 알고 있나이다.”

황제가 만족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들어서 아들과 을지 장군이 붙잡은 손 위에 얹었다. 다시 그는 힘껏 을지 고와 아들의 겹쳐진 손을 잡고 몸을 약간 움직여서 왼팔까지 옮겨 그들 셋은 힘주어 붙잡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해했다. 잠시 후 황제는 두 사람의 손을 놓고 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폐하, 아무 심려 마옵시고 졸지에 밀어닥친 병마를 몰아낼 수 있도록 심기를 편히 하소서. 소인이 태자 마마를 받들어 나라와 백성 돌봄에 한 치의 빈틈도 없게 하올 터이니 하루빨리 병마를 물리치고 다시 일어서시기만 하옵소서.”

“그러하옵니다. 소자가 사부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고 있나이다. 아바마마, 소자가 호레즘에 오래 머물겠다고 고집한 것을 용서하소서. 호레즘은 장차 우리 제국이 동로마로 가는 길목입니다. 그 길은 서방으로 열리는 것만 아니라 동방으로 가야 할 길입니다. 아시아의 대로를 열어야 합니다. 아시아 남방의 큰 길을 열고 북방 초원을 확보해 조상 야율 아보기 할아버지의 영토까지 회복해 유라시아를 통합시킬 시대를 열어가고자 합니다. 아바마마는 강녕함을 되찾는 일에 전념하시면서 소자의 포부가 아바마마의 것임을 확인해 주소서.”

태자 요한이 열심히 포부를 말하는데 무심한 듯 황제는 잠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을지 고가 어의에게 눈짓했다. 어의는 황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을지 고의 눈짓이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편히 쉬고 계십니다. 그동안 태자마마를 기다리느라고 심려하시던 마음이 편해지시면서 잠이 드셨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을지 고는 그때서야 주변을 살피면서 뒤로 물러선다. 궁 내시부 환관장도 안심시키고 황제의 침궁 밖에 대기하고 있는 대신들에게도 가서 쉬도록 명령했다.

을지 고는 태자와 함께 황제의 침궁 옆 별실로 가서 마주앉았다.

“사부님께서 계시니 제 마음이 참으로 편하옵니다. 아바마마가 저보다 사부님을 더 신뢰하신다는 평소의 느낌이 지금은 제게 큰 위로가 됩니다. 이렇게 감읍할….”

을지 고가 태자의 다음 행동을 만류했다. 태자는 하던 말을 중단하고 을지 고의 손을 붙잡는다.

“태자마마, 감상에 젖으시면 안 됩니다. 폐하께서는 태자를 의지하고 계십니다. 소인이 죽기를 각오하고 이 말씀을 올립니다.”

“무슨 말씀을요….”

“마마, 양위 준비를 하소서. 폐하는 더 이상 보위를 지켜 가실 수 없다고 어의가 제게 이미 말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사부! 그렇게나요?”

“태자마마, 단단히 각오하셔야 합니다.”

“사부! 이건 형벌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준비가 되어있지도 않고, 때가 되면 사부님과 의논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보위를 이어갈 뜻이 없습니다.”

“뭐, 뭐라 말씀하시옵니까? 보위, 보위가 무슨 선택인 줄 아셨습니까?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태자마마, 누가 들을까봐 겁이 납니다. 이 위급한 시간에 그 같은 말씀을 함부로 하시다니…, 내 참. 태자마마가 소인을 사부라 하시니 말씀드리는데 다시는 그 같은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사부님, 내가 하는 말을 허투루 들으시면 안 됩니다. 저 아직 어린아이나 같습니다. 성년기가 될 때까지 사부님이 보위를 지켜주세요.”

을지 고는 할 말을 잃었다. 태자가 철부지란 말인가.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인가. 사려 깊은 태자가 오늘 왜 이러는가. 물론 태자의 마음을 안다. 저가 왕이 되는 것을 꼭이 싫어하거나 피하자는 뜻이 아니라 자기에게 지금 황제 수업이 모자라다는 뜻으로 한 말일 것이다.

“사부님, 저는 아바마마가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할일이 남아있어요. 왕좌보다 더 급한 일이 있습니다. 저희의 경쟁자는 저 십자군 전쟁의 승자와 몽골 초원의 최강자가 누구일지는 모르나 저들 십자군 승자와 몽골 초원의 지배자가 나타날 때 저들을 이끌어가거나 저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평화로 이끌어갈 시대의 명령이 내게 있습니다. 카라 키타이는 부황께서 지금 계시고, 또 사부님이나 고모님이 지켜주셔도 됩니다. 아바마마가 지금 건강하시다면 20년이나 30년 뒤에 제가 보위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제게 공부가 더 중요합니다. 제발 사부께서 제 마음을 헤아려 주셔야 합니다.”

태자의 말이 진실했다. 그 증거로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눈물이 아니라 눈물로 호소하는 태자의 계획과 선택은 다 옳다. 을지고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에게 매달리는 태자의 두 손을 마주잡고 말없이 태자가 앞서 발설한 태자의 고모, 현 황제의 누이 야율 보속완을 떠올려보았다. 보속완은 하나님께 그 몸을 바쳤다면서 결혼도 거절하고 현재 군의무대를 책임지고 있었다. 을지 고 아내 나비소와 함께 제1군과 제2군을 담당하고 있다. 제2군은 의무와 병참부를 겸하는데 두 여인이 함께 담당하고 있다. 생각을 거듭하던 을지 고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태자마마, 황위에 오르신다 해도 지금 마마가 품고 있는 목표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 걱정 마소서. 소장이 반드시 마마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목숨 다해 충성하겠나이다.”

“사부님, 이미 사부님은 저와 카라 키타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오래 전에 말씀하셨는데 아직도 또 바칠 목숨이 남아있습니까?”

태자 요한은 을지 장군에게 농담하듯이 말했다. 목숨을 바친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소신과 함께 태자는 을지 고의 속마음을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마마, 마마께서 소장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를 지금 발견했나이다.”

“사부님! 무슨 말씀인가요?”

태자가 긴장했다. 목숨이 몇 개냐고 쉽게 말했던 자기 입술을 뒤늦게 한손으로 틀어막았다.

“태자님의 속마음을 지금 한순간에 다시 한 번 깨달았나이다. 태자님과 제가 황제 폐하의 안위가 화급지경인 이 시간에 말하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입니다. 제가 태자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으면서 우리 둘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오늘밤 기도하고 내일 아침에 저의 답변을 태자마마께 올리겠나이다.”

“알겠습니다. 저도 다시 한 번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태자와 을지 고는 황제 곁으로 가서 주변을 살피고 황제 곁에서 밤을 지키는 환관장과 어의를 잠시 쉬게 했다.

                                   조효근/소설가,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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