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천년여행 [ 223 ] / 사제 왕 요한 28

어둠의 시간, 아직 사물이 채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태자는 꿈을 꾸다가 놀라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의 곁을 지키는 을지 고는 야율 이열 황제의 얼굴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 황제의 얼굴이 순간순간 변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운지 미간을 찌푸렸다가 입을 오물거리며 얼굴이 다시 밝게 펴지고 양 볼과 입술 사이에 웃음기가 돌기도 했다.

꿈을 꾸시는가? 을지 고는 황제의 얼굴 변화에 긴장하고 있었다. 태자는 을지 고와 달리 잠시나마 잠속에 빠져들었던 점을 부끄러워했다. 아무도 그를 책망하지 않았으나 그는 자신이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황제가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지른다. 상체를 바르르 떨면서 몸을 일으키려는 듯 두 손을 움직이려 들었다. 놀란 을지 고와 태자가 거의 동시에 마마…, 하고 절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환관들 몇이 달려왔다. 그들이 달려오는 사이 태자와 을지 고가 황제 가까이 나섰다. 그러나 다시금 황제는 조금 전보다 더 크게 악, 소리를 지르면서 두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폐하! 어인 일로 고통스러워 하시온지요.”

을지 고가 약간 목소리를 올려 말하면서 황제의 상체를 흔들었다. 황제가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음, 음…. 황제가 평정을 찾으며 눈을 떴다. 태자 요한을 불렀다. 요한이 무릎걸음으로 황제 가슴께로 다가갔다.

“아바마마! 소자 여기 있나이다.”

“오냐, 그래야지. 태자야, 이제 아비의 짐을 이어 받으라.”

“아바마마, 아니옵니다. 마마,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셔야 합니다.”

“을지 사부!”

황제가 을지 고를 바라보면서 가까이 불렀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요. 태자를 부탁하오. 사부….”

황제 야율 이열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어의들이 달려왔다.

“사령관님! 준비하셔야 합니다.”

어의가 황제의 손목을 만져보고 가슴에 귀를 기울이다가 을지 고에게 다급한 소리를 했다. 누가 더는 말하지 않았으나 황궁의 비빈들이 모여들고 대신들과 장군들도 궁성 안으로 달려왔다.

을지 고는 전군에 비상 경계령을 내렸다. 하지만 황제는 새벽시간의 위기를 이겨내고 낮에는 얼마간의 여유가 있어보였다.

어의 왕충지가 태자 가까이로 와서 황제의 용태를 말했다. 황제는 회복이 불가한 병을 앓고 있으니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제가 병석에 누운 지 세 주일이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국의 통치는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을지 고가 태자 요한과 태자궁에서 만났다. 을지 고는 태자와 의논하고 야율 보속완을 불렀다. 보속완이 달려왔다. 그들은 태자의 양위준비를 위해서 모였다. 태자가 고모인 보속완에게 자기의 결심을 말했다.

“공주마마, 조카의 처지를 헤아려서가 아니라 카라 키타이의 앞날을 위해서 결단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보속완은 태자를 향해 말했다.

“태자이십니다. 이는 천명입니다. 부왕의 뜻을 따르기로 한지가 10년이 다 되었는데 지금 무엇을 더 망설이십니까? 제가 혈육으로야 고모이지만 설사 어머니라 해도 태자의 몫은 대신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또 저는 저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계획이 있습니다. 황제께서 보위에 오르시기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한 일입니다.”

“공주마마, 소장에게 그 계획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마는….”

“네, 총사령관님. 저는 태자가 보위에 오르시는 즉시 의무사령부 업무를 그만두고 수녀원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 수녀원이라…. 참 좋으신 생각입니다.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겠습니다.”

“고모님, 조카도 아들입니다. 나는 태자이기 전에 고모님의 가족입니다. 제가 황제 되는 일을 완전히 피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모님 이 어린 조카가 제국을 지켜갈 준비가 될 때까지 아바마마 대신 보위를 지켜 주세요. 저는 태자 수업을 좀 더 하고 싶습니다.”

“태자! 정신 차려요. 황제가 되는 일을 좋아서 하고 싫으면 싫어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내 참, 더는 못 듣겠습니다.”

야율 보속완이 뛰쳐나가려 했으나 을지 고가 말렸다.

“공주 마마, 두 분이 좀 더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가 카라 키타이 제국의 영광과 하나님의 복음나라를 위해서 이러는 것이잖습니까. 우리 셋이 좀 더 기도하면서 황제 폐하의 용태를 지켜봅시다.”

공주나 태자는 을지 고의 의견을 듣는지 마는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마치 눈싸움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공주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태자는 큰 인물입니다. 중앙아시아뿐 아니라 로마제국 황제들보다 더 훌륭한 자질을 하나님께서 주셨어요. 고모가 힘써 보필하고 또 을지 장군께서 아버지처럼 지켜 주시니 걱정 마세요. 우리가 황제 노릇 하자고 보냄을 받았나요.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렇죠. 을지 고 사부님!”

“그럼요. 공주마마! 그러니까 두 분께서 황제의 자리와 하늘나라 세워가는 일을 각기 맡아서 잘 해주세요. 저는 두 분 마마의 손발이 되어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그리고 지금 두 분이 잘 해주시면 제국이 강해지고 주 예수 복음을 아시아 전체를 향해 전할 수 있어요. 특히 저 몽골 초원을 위해서 저희가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또 하나, 지금 우리들이 나눈 말이 밖으로 새나가서는 안 됩니다.”

3일 후, 황제 야율 아열이 세상을 떠났다. 을지 고 총사령관은 좌우군과 중앙군 사령관은 물론 각 군사령관들과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야율 보속완 공주가 황위를 승계한다고 선언했다. 태자 요한은 계속 태자의 신분이며, 을지 고와 공동 총사령관의 지위를 유지하기로 했다고 비상회의에서 선언했다.

야율 보속완은 카라 키타이 3대 카간(황제)의 위에 올랐다. 선황제 장례를 치르고 태자 요한은 다시 호레즘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의 휘하 직속 카라진 30용사를 이끌고 갈 계획이다.

“사부님, 아버지 사부님이 계시니 저는 믿고 떠납니다.”

요한 태자는 을지 고 집으로 찾아가서 하직인사를 올렸다. 나비소가 태자 앞으로 나선다.

“태자님, 저 나비소가 더 믿음직하지 않을까요?”

나비소의 말은 그 속에 뼈가 들어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을지 고가 나섰다.

“여보, 그 무슨 신중치 못한 말을 함부로 하오. 당신답지 않게 말이요. 당신은 늘 태자의 모후 역할을 하겠다며 말해왔는데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요?”

“장군, 그 무슨 말씀을 하세요. 황궁과 군 실력자들 그 누구도 내 눈을 피하지 못하오. 나 이미 늙은 여인이지만 내가 아끼는 요한 태자 치세의 영광을 기다리는 태자의 모후나 다름없지요.”

“그럼요. 어머님, 저는 일찍 어머니를 잃고 난 후 나비소 장군을 어머니처럼 느껴왔어요. 이 자식이 반드시 그 소원을 받들겠나이다.”

을지 장군의 비서실에서 큰소리가 들려왔다. 을지 고가 머리맡의 장검을 왼손으로 잡아들었다. 비상 신호였기 때문이다. 나비소가 을지 고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부장은 들라!”

나비소가 크게 외치자 돌궐족 출신 부장이 들어왔다. 뒤이어 나비소 수행부장도 왼쪽 거실에서 뛰어 들어왔다. 나비소의 수행보좌관이다. 태자 요한은 그의 얼굴을 안다. 카라진 부대 훈련관이었다. 그는 유드게스 장군의 아들이기도 했다. 좌우 출입문이 거의 동시에 열리고 을지 고 총사령관의 보좌관과 을지 고 부인 나비소 장군의 수행보좌관이 동시에 뛰어 들어온 것이다. 을지 고가 의문에 찬 눈으로 나비소를 바라본다.

“총사령관님께 보고하라!”

나비소가 자기 보좌관 유성게에게 지시했다.

“총사령관님! 모반이었습니다. 야율 직고 장군을 군막 안에 연금시키고 그의 휘하 부대장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습니다.”

“모반이라…. 이 무슨 소린가? 자세히 고하라.”

태자가 유성게에게 지시했다.

“태자 마마. 제가 보고 올리겠습니다.”

나비소가 좌우 보좌관들을 물러가라고 손짓하고는 태자와 을지 장군 사이에 자리 잡았다. 나비소는 야율 직고 장군의 동태를 수년 전부터 살펴왔음을 말했다. 나비소는 금번에 황제 등극을 한 야율 보속완과 가까이 지내면서 야율 직고 집안과 야율 보속완이 너무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가계로 치면 오누이도 된다지만 말이다. 그러다 선황제 야율 이열이 갑자기 득병한 이후 야율 직고와 야율 보속완의 주변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가 태자의 양보로 보속완이 황제에 오르면서 머지않아 태자가 야율 성소로 바뀐다는 계획까지가 들통 난 것이다.

“거 참 잘 된 일입니다. 그대로 진행되면 좋겠는데요. 핫하….”

태자 요한의 말에 을지 고와 나비소는 맥이 빠진다. 저런 태자에게 나라를 맡겨도 될까. 그러나 말끝에 헛허, 하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비소가 태자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 안는다.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격려하듯이.

“우리 태자마마가 이제 소년이 아니네. 감히 마마를 껴안았으니 내가 큰 죄를 지은 것입니다.”

나비소는 놀란 을지 고와 태자를 안심시키려는 듯 두 사람 얼굴을 각기 바라보면서 한쪽 눈으로 웃는다. 

조효근/소설가, 본지 발행인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