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과제를 모색한다_3

제목만 보면 요즘 한국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박정희 탄생 100주년’ 시비인가, 할 수 있겠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공(功)과 과(過)의 문제를 거론하는 내용이다. 며칠 전까지 한국교회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를 하느라고 떠들썩했으나 그 내용들이 대체로 기대 이하였다.


1. 왜, 16세기 개혁 반성문 쓰지 못하나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16세기 개혁자들의 사상과 그들의 행동에서 공과 과가 각기 별도로 있음을 모르고, 또 모른 척하려드는가? 루터의 활동이 모두 옳고, 모두 정의로웠던 것은 아니지 않을까?

루터나 그들 16세기 개혁자들은 특별히 천재성을 가졌다기보다는 목동노릇을 하다가 왕이나 선지자로 불림을 받았던 다윗이나 아모스처럼 어느 날 갑자기였다.

상고대사회인 다윗이나 선지자 시대와 달리 중세 1천여 년 기간은 로마와 게르만의 자신만만했던 시대였다. 마치 동서유럽 모두가 통일제국이나 다름없는 로마, 그것도 정치와 종교가 단일이데올로기를 형성하던 시대였다. 그런 틀을 깨고 근세사를 열고자 했던 16세기 전반부는 결코 녹록한 시대가 아니었다. 

특히, 루터에게는 기대가 컸기에 실망도 컸을까. 루터 선생의 개혁자 생애 중 아쉽고 안타까운 부분들,

1) 1521년 보름스 회의장에서 재판을 받을 때 첫째 날의 루터보다 둘째 날의 루터가 용맹스러웠던 점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였거나 아니면 독일인들, 특히 작센족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의 힘이었나?

2) 황제의 허락으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때 갑자기, 납치로 위장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공의 보호전술로 그의 별장인 바르트부르크(1521~1522) 피난으로 목숨을 건지고 독일어 성경 번역까지 했던 날도 무조건 은총의 시기였다고만 할 수 있는가?

3) 만인제사론, 함부로 들먹이다가 농민저항군 세력들을 돕기는커녕 그들 농민군 10만 명을 죽고, 죽을병에 시달리게 하고, 노예로 다시 팔려가게 만드는 일, 그때 재세례파나 토마스 뮌쩌까지 싸잡아 비난했던 일까지 루터의 광기와 이기적인 태도가 과연 용납 받을 수 있다고 보는가?

4) 수도원, 수녀원을 무조건 폐쇄시키고 신부와 수녀들을 억지로 결혼시킨 일들이 과연 옳았던가?

5)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 때, 동급의 개혁자인 취리히의 쯔빙글리와 그의 동지들에게 폭언과 저주를 행한 일, 스위스 취리히 내전으로 쯔빙글리가 사망했을 때, 루터가 보여준 행위, 어디 그뿐인가? 이미 쯔빙글리가 전쟁터에서 전사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도 그가 지옥에 갔을 수 있다는 식의 표현을 서슴지 않았고, 세상 떠나기 1년 전(1545)년 겨울까지 취리히(쯔빙글리) 개혁자들을 저주했던 비텐베르크 천중번개 선생인 루터는 그 스스로 화체설과 상징설 모두의 노예가 되어버린 듯한 모습을 역사 속에 남겨두었는데 그가 모두 옳은가?

 

2. 16세기 한계, 루터에게만 떠넘길 수 없어

개혁자 루터는 당시 종교개혁의 파장이 너무 큰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고민도 많았다. 박수치면서 달려오는 개혁 찬동자들 중 급진, 또는 비 신앙적인 인문주의자들, 개혁보다는 가톨릭 교황권에 맹목성 불만을 가진 패배자들, 더구나 어려운 사회문제들(예를 들어 농민반란 같은 경우)을 루터에게 떠넘기는 사람들, 또는 가톨릭 주교단이나 귀족들. 마치 만능의 해결사라도 되는 양 루터는 휘말려 들어갔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영웅일지 모른다는 자기 과신의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루터는 그 자신마저도 자기 모습의 변화를 두려워하기에 이르렀지 않았을까?

16세기 현상은 루터에게만 짐을 지우기에는 너무나 크고 무거웠다. 다시 말하거니와 중세기까지의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세계관의 엄청난 변화기의 유럽은 천재나 영웅 몇 사람에게 떠넘기기에는 너무나 그 짐이 무거웠다.

 

3. 21세기 종교개혁인물 찾기

세계교회, 특히 한국의 “종교개혁 500주년 찬가”를 들어보고, 또 못난 후손으로의 “500주년 자기반성문”을 읽어보니 고민하거나 괴로워해본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필자가 루터의 아픈 이야기를 계속 쓰고 있는 것은 루터의 영광이 배가 아파서가 아니다. 도무지 반성할 줄 모르는 오늘의 교회들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감히 유럽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유럽은 루터가 세상을 떠날 무렵부터 자기 변화를 위한 몸부림과 온몸과 생명을 내걸고 16세기 종교개혁의 열매를 얻어내려고 험난한 500년을 마치 “실험시대”나 되는 듯이 살아왔다.

보라! 루터가 아직 살아있을 때부터 일어난 독일 내의 종교전쟁, 네덜란드 내전, 30년 전쟁(1618~1648)에 휘말려든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 1517년부터 1799년 프랑스 혁명까지 200년 가까운 날 동안 유럽은 11년만 전쟁이 없었고 그 모든 날들이 종교문제 중심에 휘말려 전쟁으로 쉴 날이 없었다.

사상적으로 독일의 경건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 사회주의 운동까지 1991년 소련의 공산당 혁명 실패까지가 모두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의 연장선상에서의 400년 세월이었다.

한국교회는 “푸닥거리 식 이신칭의”라는 미신신앙에서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푸닥거리 식 미신의 한국교회는 아직도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복채타령, 큰 교회 타령, 무당 굿 같은 변질된 교회 방식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죽은 송장 같은 교회조직, 교회예산, 세습 모색, 재산 빼돌리기 식 탐욕에 매달리는 자들이 있는가하면 봄철 대밭에 가보면 제법 쓸 만한 죽순들이 쑥쑥 자라는 것을 볼 때처럼 한국교회가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 30대나 40대들 중에 고민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도 변해야 하겠다, 변할 수 있다, 유럽교회에 뒤지지 않을 21세기 예수께서 기다리시는 미래 교회의 꿈을 성취해가는 인물들이 한국교회에서도 성장해가고 있다.

너무 낙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고 있다. ①이신칭의 ②이신칭의는 그 열매로 말한다. ③만인제사는 사랑의 완성 ④골고다 체휼은 부활의 구체적 신앙으로 증거 ⑤요단강은 육신의 몸으로 건너야만 하늘나라 경험 등으로 이어가는 신앙의 완성도이다. 이신칭의가 인간의 옷을 입고, 관념의 늪을 벗어나야 한다는 경험신앙까지를 돌파해가야 21세기형 교회다.             

<계속>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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