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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레벤으로 낙향하는 루터종교개혁 과제를 모색한다_4
조효근  |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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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1호] 승인 2017.12.06  15:2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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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예배당에 내걸었던 95개 조항의 항의문 사건 후, 루터는 비텐베르크 맹주요 프로테스탄트 교황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으며 영욕의 날들을 보냈으나 드디어 비텐베르크를 떠난다.

1546년 1월이다. 무려 30여 년 동안 유럽 한구석에서 살아오던 로마 기독교를 드디어 세계의 기독교로 확대하는 근세사의 문을 열었던 사람, 역사적인 평가를 듣기는 했으나 그의 종교개혁 투쟁 30년은 피투성이의 몸으로 전쟁터생활이었다.

루터는 1546년 1월 18일 비텐베르크 강단에서 마지막 설교를 한 후 6일째 되는 날 그가 태어난 고향 아이슬레벤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2월 18일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고향 아이슬레벤에서 임종의 시간을 기다리는 20여 일 동안 마르틴 루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며 지켜주었던 필립 멜랑히톤은 루터가 남긴 마지막 저서를 안타까워했다. 그 책에는 경쟁자이기는 했으나 개혁의 동지인 츠빙글리와 취리히 개혁자들에게 루터가 남긴 저주문과 같은 책자를 참으로 안타까워했었다.

루터는 츠빙글리의 성찬론이 상징설임을 증오했으며 용납하지 못했다. 이 문제로 열렸던 4일 동안 마르부르크 회담 일화도 유명하다. 오죽했으면 츠빙글리가 전사했을 때 그의 죽음을 향해서 부덕한 말을 했던 점에 대해 필립 샤프가 그의 교회사 7권에서 루터의 소양에 대해 핀잔을 주기까지 했을까.

그러나 개혁자들의 외로운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한때는 루터나 츠빙글리와 그의 동지들 사이를 화해시키려는 주변의 노력으로 조금은 너그러워지는 듯했었다. 그래서 루터가 츠빙글리가 가톨릭 파에 의해 죽었을 때 사지가 도륙되고 짐승들 배설물에 섞여서 불태워졌던 때 자기가 함부로 했던 말을 사죄하면서 비텐베르크와 취리히 개혁자들 간 화해가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그러던 루터가 세상 떠나기 1년 전, 다시금 취리히의 성찬론자들을 저주하는 책자를 쓴 것이다. 그 내용 중에는 츠빙글리, 칼 슈타트, 슈뱅크 펠트, 오이콜람 파디우스 등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까지 포함해서 상징론자들을 향해 아래와 같은 표현을 했다. 저들 상징설 성찬론자들의 “…교리를 관용하느니 차라리 몸이 찢기고 수백 번 화형 당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까지 표현했다. 

루터는 계속해서 취리히 성찬론을 용납하지 못하고, 또 그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면서 다음과 같은 욕설을 추가하고 있다. 취리히 이단들, 위선자들, 거짓말쟁이들, 신성모독자들, 영혼 살해자들, 죽을 죄인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귀가 된 자들이라고까지 했다. 하나 더 기록하면 루터는 그가 기록으로 남기는 인생의 마지막 책에 츠빙글리의 순교의 죽음을 놓고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이었다고 거듭 말하고, 그가 과연 구원받았는지도 의심스럽다는 글을 남겼다(필립 샤프 교회사 전집, 제7권, 548쪽 참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루터 자신의 성찬론은 “변체설”이다. 가톨릭의 “화체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츠빙글리 취리히 개혁파들은 상징설이다. 변체설과 상징설의 간격뿐인데 루터는 죽을 때까지 츠빙글리를 용납하지 못했다.

그럼 제네바의 칼빈에 대해서는 어떠했을까? 다행히 칼빈은 루터와 나이차이가 25살이나 되고, 또 루터보다 늦은 1540년대에 제네바에 자리 잡았기에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칼빈이 루터의 독설에 죽어가지 않았음은 멜랑히톤의 지혜로운 처신 때문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서점에서 칼빈의 저서 몇 권을 보았으며 칼빈의 성찬론을 읽고 “이 저자는 틀림없이 학식이 깊고 경건한 사람일 것이다”라는 평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칼빈은 멜랑히톤을 통해서 1545년 1월 21일자로 루터에게 문안의 편지를 전했으며 자기의 소책자도 두 권 동봉했다고 전해온다. 그때 칼빈은 루터에게 “크게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라고 호칭했다고 한다. 또 회심한 몇몇 프랑스 난민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부탁도 곁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편지 속에 칼빈 자신의 성찬론이 기록되어 있었다. 멜랑히톤은 혹시 칼빈의 성찬론이 루터에게 시비가 되면 어쩌나 해서 이 편지를 루터에게 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혜로운 멜랑히톤, 당시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천둥번개 노인”으로 별명이 붙어있을 때였다. 자기 과신과 함께 주변의 자기와 다른 신학적 이론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강박관념도 많았던 것 같다.

자기의 시간이 거의 끝나고 있음을 직감한 루터는 1546년 1월 비텐베르크 그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고 고향 아이슬레벤으로 되돌아갔다. 개인적으로는 늦둥이들 6남매와 자신의 아내요 믿음의 동지인 카트리나를 두고 떠나는 것이 아픔도 있었을 것이다.

상당한 수준의 성공을 이루었고, 비난과 함께 찬사도 많이 받았던 생애의 막바지에 루터는 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아쉬움을 달랬을까?

혹시 농민반란 진압 문제? 그보다는 아나밥티스트 파 신자들의 참되게 살아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저들은 내 제자들과는 다르네…” 하는 깊은 회한도 있었지 않았을까?

회한?! 1525년 1월, 취리히 개혁파에서 등장한 아나밥티스트 파의 의로운 개혁파 제자들을 배출한 츠빙글리가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츠빙글리에 대한 저주는 왜 루터의 한(限)으로 남아야 했을까? 인생의 나이로 해도 츠빙글리보다 겨우 7일 먼저 태어난 친구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외롭고도 두려운 천년제국인 로마 가톨릭과의 전쟁에서 함께 싸운 동지였는데, 루터 자신보다 15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츠빙글리의 뒤를 따라서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품으로 가야 하는 시간에 마르틴 루터의 마음에는 이단, 위선자, 거짓말쟁이, 영혼살해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귀인 츠빙글리는 하나님께 버림받았을 수 있다고까지 악담을 퍼부었던 일이 견딜 수 없이 후회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코 가톨릭과의 결별을 원치 않았던 자신의 정치적 무지에 대한 회한도 있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성찬론 만큼은 가톨릭과 크게 어긋나고 싶지 않았고, 츠빙글리의 상징설이 그토록 싫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의 고향집 아이슬레벤에서 1546년 2월 18일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고 종교개혁의 마무리는 구주 예수께 부름 받은 후예들에게 맡기고 떠났다.

<계속>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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