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조년
한남대 명예교수

하나님과 가상 대화;

“삼환아, 왜 그랬니?” “하나님 당신의 뜻을 따랐습니다.” “내 뜻이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

“하나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저희 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결정하였습니다.” “아, 그래? 그 네 교회 교인들을 누가 어떻게 가르쳤는고?”

“제가 긴 기간 정성스럽게 가르쳤습니다.” “잘 했네. 자네 뜻과 교인들의 뜻이 같았겠구만?”

“예? 아! 예~~, 오! 주여!” “그게 내 뜻이었을까? 글쎄! 참 많이 싸구나!”

또 다른 가상 대화;

“얘들아, 왜 그 세습이라는 것을 그렇게 반대하는고?” “그게 하나님 당신의 뜻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아, 그래? 그게 내 뜻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아는고?” “저희 장로교헌법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법을 누가 만들었는데?” “하나님을 따르는 당신의 종들이 만들었습니다. 주님.”

“혹시 샘이 나서 그 법 만들고 반대하는 게 아니고?” “아닙니다. 저희는 그런 세습을 탐하지 않습니다.”

“만약 자네가 이끄는 교회 교인이 몇 십만 명이 된다고 해도?” “예, 절대 반대합니다.”

“글쎄! 돈과 권력과 영예를 어떻게 쉽게 버리겠니? 모두 다 내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니 고맙다만, 내 맘은 참 편치 않구나. 나를 너무 쉽게 부르네.”

솔직히 나는 어느 교회에 어떤 목사가 이임하고 취임하며, 언제 정년이 되고, 그것을 넘어 평생 목회를 한다는 등의 논란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다. 일정한 학사일정에 따라 신학을 하고, 규정에 따라서 목사가 되며, 청빙이라는 형식을 거쳐서 어느 교회의 전문 목회자로 모셔지는 것 등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물론 그런 모든 과정과 행사들은 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한다고 하니 그러리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특정한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하나의 제도일 뿐 그분의 뜻이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것을 누가 알까?

특히 대형교회에서 아들이나 사위에게 자기의 자리를 물려주는 탁월한 목회를 한 사람들의 그 속마음을 알 수는 없다. 그가 진정한 신앙인인지, 아니면 교회 내지는 종교 기업가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분란을 일으키고, 굉장한 논란이 있는 데도 대물림하는 그 속셈을 알 수는 없다. 그것이 정말로 신의 계시를 받은 결과인지? 그의 뜻이라는 자기 환상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엄밀히 따지면 신앙생활의 지도를 직업처럼 하는 것도 우습고, 또 그것을 생물학적 연령으로 규정하는 것도 우습다. 말 그대로 소명을 받아 하는 것이라면, 소명대로 하면 된다. 그런데 그 소명이라는 것에 구멍이 뚫렸기 때문에 제도로 만들고, 작위로 그것을 주고받는다. 그러니까 소명이라는 것이 제도와 양심 사이에서 방황한다. 제도를 양심에 맞추려 하고, 양심을 또 제도로 재단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혼란이 온다.

제도 속에 있으려면 함께 만든 그 제도를 따라야 한다. 그것에 따르지 않으면 그에 맞는 조치를 하면 된다. 헌법을 어겼으면 제명하거나 징계하면 된다. 그런데 돈과 권력의 권위에 눌려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쉽게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또 그에 따르고 싶지 않으면 그 제도권 밖으로 나가면 된다. 탈퇴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그렇게 하여도 자기가 양심에 따라서 한 말에 대하여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욕심이라는 것이 좀 적게 발동할 때, 양심에 따라서 한 그 말을 따르는 것이 옳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염려로 세습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무리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지나친 걱정이요 욕심이다. 내가 그의 뜻을 대신 관리한다는 ‘주의 종’의 그 속 생각은 오만이다. 성경에 물을 것도 없고, 하나님에게 물을 것까지도 없다. 아주 순수한 맘으로 제 양심에 물어보면 답은 뻔히 나온다.

한국 교회는 모두 권력과 돈과 영예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목사나 신부나 전도사 같은 중간자들을 매개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과 대화해야 한다. 앞서 가는 사람에게 잠깐 신앙의 안내를 받을 필요는 있지만, 전문, 직업 안내자는 거짓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러니 스스로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직접 고하고, 대답을 듣도록 해야 한다. 돌려서 듣거나 대리로 들어달라고 하지 말란 말이다. 그런 미숙함과 미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한국교회가 할 일이다.

대형교회의 세습 문제를 한국교회의 깊은 성찰의 계기로 삼을 때 약간 소생의 길이 열릴 것이다. 그냥 돈과 권력과 어느 권위에 눌려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 소망은 없다. 목회자들은 고요히 속 소리를 듣고, 일반 성도들은 그 목회자들의 가르침을 벗어나 스스로 직접 하나님과 대결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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